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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자료/비전교회

충돌 속에 드러난 복음의 권세

by 안트레마 2025. 3. 29.

마가복음 2장 1절–3장 5절 


충돌이 낳은 계시의 현장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은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며, 감동적인 비유를 전하시는 모습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조금만 깊이 읽어 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단순한 감동과 치유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불편함을 야기하고, 갈등을 일으키며, 당시 종교 체계와 충돌하는 삶이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이러한 긴장과 갈등의 전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는 복음서입니다.

마가복음 2장부터 3장 초반까지, 예수님은 연이어 다섯 번의 논쟁에 직면하십니다. 중풍병자를 고치며 죄를 사하신 일, 세리 레위의 집에 들어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사건, 금식 문제에 대한 대응,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사건, 그리고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까지—이 모든 장면은 예수님과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충돌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충돌은 단지 사건의 전개를 위한 갈등 구조가 아닙니다. 이 다섯 논쟁은 각각의 사건 안에서 예수님의 정체성, 그리고 그분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기존 질서와 충돌하셨을까요? 그리고 그 충돌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 어떤 도전을 줍니까?

오늘 우리는 이 다섯 논쟁을 하나씩 따라가며, 그 안에 담긴 복음의 핵심을 살펴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복음의 권세, 그리고 그 권세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1. 첫 번째 논쟁: 죄 사함의 권세 (2장 1–12절)

본문 이야기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십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셨고, 곧 소문이 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이 가득 찬 그 집. 그런데 그곳에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자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환자를 달아 내립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놀라운 믿음의 용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2:5)

모든 이가 놀랐을 것입니다. 아니, 병을 고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죄를 사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걸까?

바로 이 말이 문제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질문하십니다.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2:9)

그러고는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라.”

그는 곧 일어나 자리에서 걷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죄 사함, 예수님 정체성의 첫 선언

이 사건은 단순한 병 고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처음으로 논쟁이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첫 논쟁의 주제는 바로 죄 사함의 권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주장하셨기 때문에 생긴 충돌입니다.

유대교 체계 속에서 죄는 제사장을 통해,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제사 없이, 성전 바깥에서, 제사장도 아닌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로 죄를 사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기존 종교 체계를 정면으로 흔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죄 사함이 쉽냐, 병을 고치는 것이 쉽냐?” 누가 보더라도 병을 고치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기적입니다. 죄 사함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권세, 곧 죄 사함의 능력을 병 고침을 통해 눈에 보이게 증명하신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누구에게 있는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기적의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왜 죄를 사하는 일을 병 고침보다 먼저 하셨는가입니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문제만 해결되길 원합니다. 병, 가난, 외로움, 실패, 관계의 문제...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내면의 병, 곧 죄의 문제를 먼저 다루십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치유는 마음의 회복, 죄로부터의 자유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 병 고침이냐? 문제 해결이냐? 아니면 죄 사함을 통한 영혼의 구원이냐?"

 

나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이 장면에서 중요한 인물은 단지 병자와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지붕을 뚫고 친구를 달아 내린 네 명의 친구들. 이들의 믿음은 단순한 확신을 넘어서 행동으로 표현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믿음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붕을 뚫을 만큼 용감한가요?, 혹은 비판을 두려워해 조용히 앉아만 있는 신앙인가요?

또한 우리는 율법학자들과 같은 태도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외형적인 종교 행위는 있으나, 죄 사함의 기쁨과 능력은 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2. 두 번째 논쟁: 죄인과의 식사 (2장 13–17절)

본문 이야기

갈릴리 해변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세리 레위, 즉 마태를 보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세리는 당대 유대 사회에서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로마에 협력하여 세금을 걷으며 부정한 이익을 취했던 이들. 종교적으로는 부정하게 여겨졌고, 사회적으로는 배신자 취급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레위를 향해 한마디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 한마디에 레위는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레위는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하고,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도 함께 식탁에 앉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장면을 보고 제자들에게 항의합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님의 대답은 짧지만 강력합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복음의 대상: 경건한 자가 아니라 죄인

이 장면은 복음의 본질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왔는지를 명확히 선언하십니다. 복음은 완전한 자, 자격 있는 자, 종교적으로 모범적인 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죄인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먼저 그들의 식탁에 앉으십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식탁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교제와 수용의 상징이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고, 바리새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죄인을 위한 교회인가, 의인을 위한 교회인가

오늘날의 교회는 어떤가요? 우리는 때로 교회를 너무 ‘깨끗한 사람들만의 공동체’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실수하고 상처 입고, 삶이 무너진 사람들은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고 있는가요? 아니면 조용히 가장자리에만 머물러야 하는 분위기인가요?

예수님의 식탁은 열린 식탁이었습니다. 회복과 회개의 가능성을 품은 만남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복음의 식탁을 누구에게 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복음은 초대이다

복음은 자격을 갖춘 자들에게 주어진 보상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우리의 사역과 목회, 우리의 공동체는 복음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가요? ‘이런 사람은 와도 되고, 저런 사람은 좀 곤란하다’는 은연중의 선을 긋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님은 그런 선을 넘어, 사람의 삶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 열린 마음, 열린 식탁을 회복해야 합니다.


3. 세 번째 논쟁: 금식 논쟁 (2장 18–22절)

본문 이야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열심히 금식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두 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새 옷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방식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지 금식의 문제를 넘어서 시대의 전환을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새로운 시대, 곧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를 가져오셨습니다. 이 시대는 슬픔과 금식이 아니라, 기쁨과 잔치의 시간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 곧 복음이 임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옛 종교 체계로는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낡은 옷에 새 조각을 대면 찢어지고,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터져 버립니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그릇, 새로운 구조,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담는 그릇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의 신앙과 교회는 여전히 옛 부대를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을 담는 방식이 너무 낡아버려서, 새 생명을 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단지 옛 체계 속에서 조금 더 좋은 설교를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는 기존의 모든 구조를 새롭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삶의 구조 자체가 뒤바뀝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우리도 복음을 담을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교회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력을 담을 수 있는 유연하고 열린 마음과 공동체의 구조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과거의 방식만 고집하고 있다면, 복음은 그 틀 안에서 터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4. 네 번째 논쟁: 안식일 밀 이삭 사건 (2장 23–28절)

본문 이야기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며 이삭을 잘라 먹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보시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자기와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결정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인자는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율법의 본질을 되묻다

안식일은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 중 하나였습니다. 창조의 질서와도 연결되어 있고, 출애굽의 기억, 쉼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규정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논쟁을 통해 안식일의 참된 본질을 회복시키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억누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해석권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이 갖고 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말이었고, 갈등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 갑니다.

 

쉼을 주는 신앙

우리의 신앙은 사람들에게 참된 쉼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규칙과 율법으로 부담을 더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자유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사역은 사람들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으로 초대하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5. 다섯 번째 논쟁: 손 마른 사람 치유 사건 (3장 1–5절)

본문 이야기

안식일에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에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가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치는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소하려는 의도를 품고 말이죠.

예수님은 그 사람을 가운데 세우고,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악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탄식하며 노하시고,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십니다.

 

생명을 외면하는 종교

이 장면은 앞선 논쟁들의 절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제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가 아닌가보다,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병자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생명의 회복보다, 자신들의 정통성과 권위를 지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고함에 분노하십니다.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진노는, 생명을 외면하는 종교에 대한 거룩한 분노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생명을 살리는 것

우리의 신앙과 목회는 어떤가요? 율법의 이름으로, 혹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의 본질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쉼과 회복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 안에서는 오히려 감시와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교회의 중심에 생명을 두길 원하십니다. 말씀의 본질, 예배의 중심, 사역의 이유는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외면한 신앙은 진리가 아닙니다.


 

충돌 속에 드러난 복음의 본질

마가복음 2장 1절부터 3장 5절까지, 이 다섯 개의 논쟁은 점진적으로 예수님의 정체성과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충돌의 서사입니다.

  1. 죄 사함의 권세
  2. 죄인과의 교제
  3. 복음의 새로움
  4. 율법의 본질 회복
  5. 생명을 살리는 신앙

예수님은 이 충돌을 통해 복음이 단지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 구조를 바꾸는 능력임을 보여주십니다. 이 복음은 기존의 종교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워갑니다.

이제 우리에게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편에 설 것인가, 바리새인의 편에 설 것인가? 복음의 충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 마음 안에서도.

예수님은 지금도 묻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우리의 대답은 말이 아닌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마침 기도] “주님, 복음의 본질을 붙들게 하소서. 사람을 살리고, 죄인을 초대하며, 옛 틀을 넘어서는 생명의 말씀을 살게 하옵소서. 생명을 외면하는 경건, 외식적인 신앙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생명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