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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2015년 2월 14일 요한복음 11장 1~16절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이성으로 이해되고 깨달아지는 것은 알게 되고, 자기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남는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파악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주체로서의 현실적 존재가 하나 하나의 객체적 요소를 사유화하는 각각의 활동을 파악(prehension)이라고 불렀다. 파악은 주체가 객체를 사유화하고 수용하는 과정이다. 객체를 수용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하지 못할 때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게 된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의 행동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가 왜 그런 말씀과 행동들을 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배척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은 후에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가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까지 당신이 그곳에 계시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보면 제자들이 당신을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이성이나 경험 혹은 화이트헤드가 긍정적 파악이라고 말한 ‘느낌’(feeling)으로 파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 믿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의지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다짐해보아도 안 믿어지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지, 자기가 스스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도 믿음은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제자들이 본다면 그들이 자신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순전히 제자들이 당신을 믿게 하기 위함이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제자들이 당신을 믿도록 하는 것에 있었다. 


우리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예수님을 파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에 대해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때로 그 분은 우리가 믿음을 갖도록 초자연적인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보고 믿는 사람도 복이 있지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더욱 복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