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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눈

가치를 사실로 왜곡하지 말라

오늘은 글이 좀 길어질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기를 바라며 혹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지루하면 그만 두시라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글을 쓴다.

요즘처럼 우리 한국사회가 양분되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해방 이후 좌우대결만큼 양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무엇보다 기독교 지성인이며 지도자인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도 참과 거짓, 사실과 허위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며, 가치와 사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가치와 사실은 다른 의미이며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주관적인 평가의 개입여부이다. 어떤 것이 가치가 있다고 하거나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화자의 평가가 들어가 있는 경우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실과 가치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자신의 평가가 개입된 가치판단을 사실처럼 이야기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의 예를 들어 보자. 여러분이 며칠 전에 일을 하다가 허리를 삐끗해서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양손에도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마음 같아서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고 싶지만 허리를 다쳐서 무거운 짐을 들면 안되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옆을 지나가는 어떤 할아버지가 여러분을 보고 "요즘 젊은 것들은 어른을 공경할 줄 몰라. 못된 것들!”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은 마음이 몹시 상했지만 그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왔다고 가정하자.

이 상황에서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먼저 여러분의 행위에 대해 두 가지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여러분이 ‘무거운 짐을 이고 들고 가는 할머니 옆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이 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무거운 짐을 이고 들고 가는 할머니 옆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은 ‘사실판단’이고, ‘여러분이 못된 것’이라는 것은 가치판단이다. 사실 그 할아버지는 여러분이 허리를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오는지 알지 못한 채, 단순히 할머니를 돕지 않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여러분을 '못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허리를 다치지 않고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할머니를 돕지 않았다고 해서 '못된 것'이 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여러분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가는 할머니 옆을 지나쳤다는 것은 참과 거짓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판단은 실제 세계의 어떤 정보를 주는 것이며 경험을 근거로 그 정보의 정확성 여부가 판단되어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판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로 무엇인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할머니 옆을 지나갔다는 것은 정확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고 그 사실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러분이 '못된 것'이라는 판단은 개인적인 가치에 근거한 평가이어서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가치는 어떤 특정 행동양식이나 목적, 상태가 어떤 때는 바람직하고 어떤 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언제나 바람직하다고 하는 것으로 하나의 신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그의 가치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그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도 동등하게 적용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가치는 그 가치를 가진 사람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을 가치 있게 여긴다. 일요일이 그냥 공일(空日)이 아니라 주일(主日), 즉 ‘주님의 날’이라고 다른 날보다 더 가치 있는 날로 여긴다. 우리가 일요일에 ‘주님의 날’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일요일을 우리처럼 가치있게 여기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치판단을 하기에 어려운 분야는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이다. 왜냐하면 가치판단이 역사 이해를 왜곡시키거나 올바른 판단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에 가치를 부여하려면 도덕적 판단을 해야 하는데 이는 역사연구의 객관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중요한 역사적 행위에는 도덕적 문제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은데 역사적 사실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들에 근거한 합리성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사실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단순한 개인적 편견에 근거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주어진 상황과 관련하여 칭찬이나 비판을 해야 한다. 넷째, 역사를 서술한 시각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모든 세상을 제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적으로 근본주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통주의, 신정통주의 그리고 급진주의 등 다양한 신학적 스펙트럼 가운데 하나 이상의 신학적 토대 위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가질 수도 있고 보수적 성향을 가질 수도 있다. 예수님을 종으로 오신 메시아로 믿는 사람도 있고, 왕으로 오신 메시아로 믿는 사람도 있다. 각 사람은 이러한 다양한 신학적, 정치적, 신앙적 토대 위에 서서 사실을 보고 그 사실에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실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절대진리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지, 얼마나 예배를 잘 드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단지 우리가 얼마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살아가는지에 관심이 있다.

2020년 여름, 한국 사회에서는 ‘교회’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사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 때문에 교회는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고 손가락질 당하고 있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테제는 “기독교는 어떠한 사상(-ism)이나 이데올로기(ideology)와 자신을 동일화(identification)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자본주의(capitalism), 사회주의(socialism) 그리고 공산주의(communism)도 아니고 그 어떤 정치적 집단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 나라나 복음인 것처럼 주장해서도 안 된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교이다. 자신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가치판단의 결과를 사실인 것처럼 왜곡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