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직신학

교회는 하나다

교회는 하나다: 서구 신앙고백에 대한 정교 그리스도인의 몇 마디

해설: 허선화(고려대 노문과 석사, 러시아문학연구소(일명 푸시킨 연구소) 박사)

이 책은 호먀코프의 대표적인 신학적 글 두 편을 번역한 것이다. 첫 번째 글인 <교회는 하나다(Церковь одна)>는 1867년 호먀코프 사후 베를린에서 출판되었다가 1879년에야 러시아에서 빛을 본 작품이다. 두 번째 글인 <서구 신앙 고백에 대한 정교 그리스도인의 몇 마디(Несколько слов православного христианина о западных верованиях)>1)는 “서구 신앙 고백에 대한 정교 그리스도인의 몇 마디”라는 제목 아래 포함된 네 편의 글 가운데 하나로서 역시 호먀코프 생애 말기의 대표적인 글로 꼽힌다. 슬라브주의자 중 한 사람인 유리 사마린(Ю. Самарин)은 호먀코프의 신학 전집에 부치는 서문에서 그에게 ‘교회의 교사’라는 높은 칭호를 부여했다. 호먀코프는 러시아 신학의 흐름에 새로운 방법을 들여왔으며 그의 저작들의 가치와 중요성은 이후 많은 종교 사상가, 철학자, 신학자들에 의해 거듭 확인되어 왔다.

플로롭스키(Г. Флоровский)에 의하면, 호먀코프는 그의 대표적인 글인 <교회는 하나다>에서 의식적으로 증명하거나 정의하지 않고, 증언하고 묘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의 문장은 하나하나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리의 진술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는 교회는 단일하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듯이 교회도 하나다. 교회는 어떤 거짓의 혼합도 허용하지 않는 내적인 거룩함과 외적인 불변성을 그 고유한 특성으로 갖는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진리의 영이 살고 있으며 교회의 보호자이자 머리인 그리스도는 불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교회는 실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개인들은 실수할 수 있으므로 교회의 지체들 안에서는 거짓된 가르침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때 오염된 지체들은 이단 또는 분파를 형성하며 떨어져 나간다. 따라서 교회의 거룩함 자체는 더럽혀지지 않는다.

호먀코프는 하나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거나 다른 공동체와의 일치 없이 교회의 가르침에 교리적인 해석을 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교회는 전승을 보존하고 성경을 기록한 그 교회다. 즉, 교회 안의 사람들 혹은 많은 사람들이 전승을 보존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총체성 안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영이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에만 교회의 기초를 두는 자는 사실은 교회를 부인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기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호먀코프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주장에 맞서 교회가 자신의 것으로서 인정하는 모든 글은 성경이라고 진술한다.

호먀코프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고백이야말로 교회의 완전하고 충분한 신앙 고백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 고백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필리오케(filioque)라는 단어의 첨가는 경건한 작가나 감독들, 또는 1세기 사도들의 후계자 중 누구에게서도 비롯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의해 말해진 것도 아닌 거짓 교리를 담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말씀하셨고 교회가 분명히 고백해 왔고 고백하고 있듯이,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호먀코프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동방 총주교 관구와 연합되고 일치된 공동체들만이 완전한 기독교적인 공동체로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을 교회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글인 <서구 신앙 고백에 대한 정교 그리스도인의 몇 마디>는 <교회는 하나다>와는 달리 상당히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구체적인 교리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그보다 호먀코프는 이 글에서 교회의 분열의 본질에 천착하고 있다. 이 글은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정교 내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경우를 제공한다. 이 글에서 호먀코프는 가톨릭의 본질을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찾는다. 가톨릭은 거룩한 전승으로부터 분리되고 스스로 독자적인 교리 결정의 권리를 취함으로써 그 시작부터 이미 프로테스탄티즘적인 요소를 배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참된 내용이 결여된 주관적인 종교이며, 엄밀히 말해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겉으로 볼 때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공격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 글은 프로테스탄티즘의 뿌리를 가톨릭에서 찾음으로써 결국 다시 가톨릭에 대한 공격의 성격을 띤다. 그가 로마주의로 명명하는 가톨릭에 대한 공격이 이 글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호먀코프가 가톨릭과 그 연장으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비판하는 주된 근거는 그 양자가 모두 합리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데 있다. 합리주의는 개인의 주관적인 의견에 대립되는 정교회의 정통성을 담보하는 원리로서 중요한 개념인 ‘전(全) 교회적(вселенское)’ 원칙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과 개인의 판단에 의존한다. 가톨릭에서 그것은 교황의 무오성(無誤性)에 대한 주장의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던 교황의 분열을 통하지 않고서는 교회 안에서 발생할 수 없었다. 호먀코프는 프로테스탄티즘이 로마 세계의 경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런 사실로써 설명한다. 즉, 로마 세계는 개혁주의적인 신앙 고백의 사상을 탄생시킨 토양을 스스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전 세계적인 신앙의 자리에 자신의 개별적인, 지역적인 의견을 둠으로써 프로테스탄티즘의 행위를 수행한 것이다.

호먀코프는 정교와 가톨릭, 그리고 그것과 본질을 같이하는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의 일체의 연합 가능성을 부정한다. 개인적 의견의 독립성을 거룩한 전 교회적 믿음보다 더 높이 올려놓는 사람, 즉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감독의 합리주의적 의견에 전체 교회에만 속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자, 즉 로마주의자는 결코 공의회에 참석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의회는 서구 세계가 공의회의 이념으로 돌아와서 소보르노스티(соборность)에 대한 침해와 그 모든 결과들에 대해 참회하고 최초의 신앙 고백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의견을 전 교회적인 신앙의 심판에 복종시킬 때만 가능하다. 호먀코프는 서구의 분열을 근거 없고, 무엇으로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동방으로부터의 분리이고 신적인 영감의 강탈이며 도덕적인 형제 살해라고 강한 어조로 질책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합리주의에서 벗어나 불의로부터 비롯된 모든 결정들을 거부하며 다시금 교회의 하나 됨을 회복하라고 촉구한다.

이 두 편의 글은 교회사의 생소한 사건들에 대한 언급과 암시적인 표현으로 때로 이해에 어려움을 초래한다. 이 책은 정교회와 가톨릭,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이 과연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할지 모른다. 호먀코프는 그들 간의 교리적 차이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호먀코프의 주된 관심은 교리적인 쟁점을 부각시키고 그럼으로써 정교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가톨릭이 하나인 교회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근본적인 원인에 집중하고 있다. 그에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은 별개의 두 기독교 세계라기보다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두 줄기에 불과하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가톨릭의 연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두 편의 글에서 호먀코프는 교리적인 오류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이 참된 하나의 교회에서 벗어나 길을 잃었음을 충분히 논증하고 있다.

국내에는 아직 정교회에 대한 소개가 충분치 않고 정교 신자들도 극소수다. 기독교라고 하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매우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가톨릭 신앙과 프로테스탄티즘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호먀코프의 전투적 태도는 일말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호먀코프의 진리에 대한 열정은 매우 큰 호소력을 지닌다. 그리하여 비록 입장이 다르더라도 그의 말을 쉽게 무시하지 못하고 귀 기울여 듣게 만든다. 그가 원했던 것도 아마 이것이었으리라. 그가 원한 것은, 잊혀진 동방의 형제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에 진지하게 반응해 오는 것이 아니었을까? 정교 신학자의 입을 통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정교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제공하는 이 글을 통해 지금껏 낯설었던 기독교 세계의 또 다른 반쪽에 대한 보다 명료한 이해가 생겨나기를 기대한다.

각주

'조직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원칙의 중요성  (0) 2013.08.03
계시와 조명  (0) 2013.08.03
축자 영감  (0) 2013.08.03
삼위일체 하나님  (0) 2013.07.16
계시란 무엇인가?  (1) 2013.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