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거울 앞에 설 때가 있다.
문득, 내 눈가에 자리한 잔주름이, 머리카락 사이로 번져온 하얀빛이
세월의 속삭임처럼 나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지금 어디쯤 와 있니?"
젊었을 땐 몰랐다.
세월이 이렇게 말없이 지나가며 내 몸과 마음, 생각과 시선을 바꿔 놓을 줄은.
지금은 문득문득 느껴진다.
어떤 생각은 더 오래 머무르고, 어떤 말은 삼켜지며,
예전처럼 ‘정답’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제 ‘나이 들어간다’는 말을 ‘늙어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 몸이 약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며,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시간이라는 걸
조금씩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한때는 더 많이 알고 싶었고, 더 잘하고 싶었다.
성경도 더 깊이 파고들었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논리적으로 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한 사람의 아픔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이 더 귀하다는 걸 안다.
진리를 말하는 입보다, 진리 앞에서 고개 숙이는 태도가 더 소중하다는 걸 배워간다.
성경은 지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
이 말씀을 처음 읽을 땐, 그냥 멋진 격언처럼 느꼈다.
하지만 나이 들어 다시 읽게 되자, 그 말씀은
내 삶을 하나님 앞에 조용히 내려놓는 고백처럼 들렸다.
하얀 머리카락이 단지 세월의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며 살아온 흔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런 ‘면류관’이라면, 나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바울이 나이 들어 고백하던 말이 자꾸 떠오른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절)
이 고백은 나에게 언제나 두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 내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겸손.
둘째, 여전히 주님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은혜.
그래, 아직 나도 길 위에 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이 듦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시기’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시간이다.
이제는 모든 것의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듬어 찾는 시간이 많아졌고,
모든 상황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품으려는 시도가 깊어졌다.
젊었을 땐 ‘아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아는 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지식은 늘어났지만,
그 지식을 누군가를 살리는 데 쓰지 못하면
그건 결국 내게 짐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모든 걸 설명하는 자가 아니라,
때로는 그저 함께 있어 주는 자로,
말보다 기도로 동행하는 자로,
교훈보다 삶의 본이 되는 자로.
죽음도 멀리 있지 않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리 두렵지는 않다.
왜냐하면 내 삶이 하나님의 손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분의 품 안에 있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묻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남았는가?’를.
대신 이렇게 묻는다.
‘내가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기도한다.
하나님,
나이 들수록 더 말이 줄어들고,
더 사랑이 커지고,
더 겸손히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지혜란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더 바르게 살아가는 것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제 삶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빛으로 남기를 원합니다.
마지막까지, 주님 손 붙잡고
조용히, 그러나 진실하게 주님을 향해 걸어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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