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2021. 7. 9. 14:51

인간이 낙원에서 죄 없이 창조되었을 때 죄를 지으라는 악마의 유혹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악마를 정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서 하나님 편을 들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악마는 누군가의 유혹을 받지 않고도 하늘에서 죄를 지었으며, 인간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더 약한 인간이 땅에 죄의 유혹을 거절하기만 한다면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영광을 돌리며 악마를 부끄럽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러한 행동을 쉽게 할 수 있었음에도, 또한 아무런 강요를 요구받지 않았음에도, 인간은 유혹 그 자체만으로 기꺼이 자기 자신을, 정복당하도록 악마의 뜻에 내어놓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명예에 대적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 안셀무스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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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2020. 3. 16. 15:33

교회란 무엇인가 .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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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 명사 ekklesia는 에크(ek: 로부터)와 칼레오(kaleo: 부르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따라서 이 단어는 '불러낸 자들(의 전체)'이라는 의미
  • 이 단어는 유리피데스(Euripides)와 헤로도투스(Herodotus)(주전 5세기)부터 사용
  • ekklesia는 그 도시의 신들에게 기도와 제사를 드림으로 개회
  • ekklesia는 전체 시민들의 집회로, 기능에 있어서 민주주의 구조에 뿌리를 내린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기본적인 정치적 결정과 사법적 결정이 내려짐

2. 70인역본의 용법.

  • ekklesia70인역본에서 약 100회 나오며, 그 중 22회는 외경에 나옴
  • qahal(ekklesia)은 언약을 맺음으로써 생겨난 회중, 시내산 공동체 사회에 대한 의례적인 표현
  • qahal(ekklesia)은 야웨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특징 지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문제가 제시되는 곳에만 사용
  • qahal(ekklesia)은 언약과,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자들을 가리키는 전문용어

3. 교회의 기초

  가. 일반적 이해

  • 명사 ekklesia는 신약성경에서 11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
  • ekklesia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뚜렷한 것은 이 단어가 마 16:18과 마 18:17을 제외하고는 복음서에 전혀 나오지 않음
  • 초대 기독교의 모든 제자들이 ekklesia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하심 후에 나타난 교제 모임을 나타내는 데에만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확실함
  • 이 단어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시기 또는 예수님 주위에 모인 제자들을 묘사하는 데에는 사용되지 않음

 나. 교회의 기초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
  • 예수님이 세우심
  • 이 반석(신앙고백) 위에 세우심
  •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
  •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예수님
  •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함

4. 교회의 사명

  •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4:23)
  • 가르치는 사역
  •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
  •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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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2019. 6. 2. 07:14

예수님께서는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8:3) 말씀하셨다. 인도의 위대한 시인이요 철학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귀절이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같은 말씀을 마가복음으로부터 인용하였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0:15).

그는 힌두교인이었으므로돌이켜라는 문구가 생략된 본문을 취하였다. 그는 회심을 좋아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듯이 회심을 개종과 혼동하였다. 당신은돌이켜” -뿌리를 떠나서- “어린아이 같이 -열매- 없고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 - 또한 열매- 없다. 가지가 공존해야 한다. 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돌이켜” - 새로운 방향, 둘째, “어린아이 같이 ” - 새로운 탄생, 셋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 - 새로운 생활. 가지는 회심의 본질을 제시해 준다. 

- E. 스탠리 존스, <회심의 본질>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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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2017. 4. 5. 21:51

 

현대신학의 종말론

목창균

 

Ⅰ. 머리말

종말론은 조직신학의 중요한 주제요, 그에 대한 성서적 근거가 풍부하며, 교회의 공식적인입장이 비교적 일찍이 표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신학적관심의 주요 대상에서 거의 제외되었다. 종말론이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이후였다. 이는 과학 및 기술의 발전과 제3세계의 태동 등으로 인한 현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신학이 종말론과 관련하여 제기한 주문제는 종말을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종말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역사를 초월해 이루어지느냐하는 문제도 논쟁이 되었다.

  필자는 이글을 통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20세기 희망의 신학에 이르기까지 종말론에 대한 중요한 이론들을 개괄함으로써 현대 종말론의 동향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제시하는 동시에 그 대안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려고 한다. 현대 종말론의 중심 문제는 하나님 나라였으며, 그것의 현재성과 미래성 중 어느 한편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Ⅱ. 자유주의 신학의 종말론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특히 독일 신학계를 주도한 신학사조를 자유주의, 혹은 현대주의 신학이라 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것이다.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에 두고 사회적 환경을 관심의 주 대상으로 하며 이성을 신뢰하고 예수의 인간성과종교적 관용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 등이 이 신학의 주요한 특징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여러 갈래로 다양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종말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를 인류의 모본이나 교사로 보고 하나님나라의 미래적이며종말론적인 면보다는 현재적인 면을 강조하여 인간의 종교적 경험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 그 공통점이다. 이제 자유주의 신학의 왕자라 불리는 알브레히트 리출(Albrecht Ritschl, 1822∼1889)과 자유주의 신학을 대중화시킨 아돌프 하르낙(Adolfvoil Hamack, 1851 ∼1930)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종말론을 살펴보자.

  리출은 신학의 영역으로부터 모든 철학과 신비주의를 축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복음을 신학의 토대로 삼았다. 한편 그의 신학 체계의 중심점은 하나님나라였다. 그는 종교 개혁자들이 성서적인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교회를 개혁하려 했으나 그들의 종교적인 통찰을 통전적인 신학 체계로 정립하지는 못했다고 보았다. 그들은 신앙에 의한 칭의의 교리와 하나님나라에 대한 성서의 교훈사이의 관계성을 주목하지 못했다. 죄로부터의 개인적인 구속을 강조했으나 사회 구원을 지향하는 윤리적인 활동을 소홀히 했다. 리출은 종교 개혁자들의 이런 취약점을 보완하여 종교개혁 작업을 완성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리출은 기독교를 하나님나라를 창건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위에 세워진 영적 윤리적 종교로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기독교는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이 아니라, 두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다. 종교적 또는 영적 중심과 도덕적 중심이 그것이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속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 기독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속에서 존재하는 한 영적이다. 후자는 그리스도가 창건한 윤리적인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가 교회인 동시에 하나님나라이다. 그것의 목표는 인간 사회 전체를 하나님나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사랑에 감동된 행위를 통하여 이룩된 인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인 동시에 인간의 최고 선이다. 기독교인의 임무는 그것을 확산하는 것이다. 리출은 하나님 나라를 지고의 윤리적 이상으로 간주했다.

  리출의 견해는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전적으로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 특징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윤리적인 인간 공동체였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창건한 예수는 윤리적으로 위대한 교사요 인류의 원형이었다.리출 신학의 문제점은 기독교의 본질을 예수그리스도보다는 영적이며 윤리적인 가치로 간주한 것이다. 신약성서의 하나님나라를 단지 인류의 도덕적 기관으로 취급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낳은 탁월한 교회사가 하르낙은 1899∼1900년 겨을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한 것을 책으로 출판한 「기독교의본질」(Das Wesen des Cristentums, 1900)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중적인 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예수의 설교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세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님 나라와 그 도래,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및 보다 높은 정의와 사랑의 계명이 그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복음이었다.

  하르낙에 따르면, 하나님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극(pole)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외적 통치로, 그리고 그것의 도래를 미래적인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내적 통치로, 그것의 도래를 이미 실현된 현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르낙은 예수의 설교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도래의 개념이 명료하게 제시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전승된 것과 예수 자신의 것이 혼합되어 있다. 전술한 두 극 가운데 전자는 유대 민족의 종교적 전승으로부터 유래된 것이고, 후자는 예수 자신의 것이었다. 하나님의나라가 미래에 도래하리라는 개념이 껍질이라면, 이미 도래했다는 개념은 예수 자신의 생각인 동시에 알맹이었다. 하르낙은 하나님나라를 "개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했다.

  하르낙은 예수의 인격과 설교에서 종말론적 측면을 명확히 주목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특히 바울에게 충만해 있던 종말론적인 의식을 정당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교리도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껄질로 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다시 오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하며, 이것이 그 핵심이다. '리출과 하르낙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이나 미래적인 성격을 거부하고 현재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종말론을 경시하고 그것을 진보적 역사관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윤리적 영역이나내적 체험의 영역으로 제한했다.

 

Ⅲ. 철저적 종말론 (consistent eschgtology)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 이해와 종말론에 입장을 달리하는 학자들이 보수주의자들만은 아니었다. 자유주의 성서 해석의 기본 방법을 수용했던 자들도 있었으며 그 중 하나가 종교사학파에 속하는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 1863∼1914)였다. "그의 저서 「하나님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Jes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1892)는 종래의 예수 연구에 종지부를 찍고 신약성서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는 예수의 인격과 설교의 종말론적 성격에 대한 철저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제시했다. 슬라이에르마허를 시초로 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가 위대한 교사요 모본이었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관심을 집중했다. 하나님나라 역시 이 경험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했다. 예를 들어, 헤르 하르낙은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나라로 생각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는 개별적인 종교 경험에 내재하며 지상의 이상적인 사회에서 점진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바이스는 또한 리출의 견해 역시 예수 자신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 사상, 즉 진화론적이며 비종말론적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확신했다. 리출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하나님나라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서로의 성별,조건 및 국적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고 사랑으로 행동하여 모든 가능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끝까지 도덕적 신념과 도덕적 선이 확장되는 공동체를 산출하는 한, 그들이 하나님나라이다."

  바이스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종말론을 거부하고, 신약성서에 근거하여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자 했다. 그는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현재적이며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종말론적이며 미래적이고 묵시적임을 이론화했다. 첫째, 하나님나라는초월적이며 초현세적인 것이다. "이 옛 세상은하나님나라를 동화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나라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한 문제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초기에 종말이 임박했다고 하였으나, 후기에는 하나님나라가 자신의 죽음 이전에는 오지 않으며, 그의 죽음이 하나님나라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작은 시작으로부터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극적인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여기에 있든가, 아니면 아직 여기에 없든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장하거나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넷째, 예수의 사명은 하나님나라를 창건하거나 선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수동적인 태도이다. 단지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바이스의 중요한 공헌은 예수와 초기 교회의 종말론적 신념을 인식하고, 예수가 실제로 이해한 하나님나라는 무엇이었는지를 발견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러한 바이스의 입장을 더욱 철저하게 밀고 나간 것이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6)이다. 바이스가 예수의 설교에서 종말론적 요소들을 제시했으나 예수의 전체 사역의 종말론적 성격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데 비해, 슈바이처는 예수의 공생애 전체가 그의 종말론적 신념과의 관계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이론을 바이스의 견해와 구별하기 위해 "철저적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견해를 그의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1906)에서 제시했다. 독어판서명「라이마루스와 브레데까지」(Von Reimarus zu Wrede-eine Geschichte der Leben-Jesu Forschung)가 시사하듯이, 이 책은 합리주의자요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라이마루스로부터 슈바이처 자신과 같은 시대 사람인 브레데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공적 사역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발전을 비판한 것이다. 여기서 취급된 근본 문제는예수가 하나님나라와 메시야의 도래에 관한 유대인의 종말론에 기초했는가 아니면 비종말론적 토대 위에 기초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슈바이처의 주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본다면, 첫째, 예수의 설교의 핵심적 요소는 그의 재림이다. 이 종말론적 설교는 그의 사역에 기본적이고 중심적일 뿐 아니라 본래적인 계획이었다. 초기 갈릴리 사역의 시초부터 예수는 자신의 설교의 토대를 천국에 두었다. 둘째,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매우 가까이 왔다고 보았다. 셋째,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개념은 유대 묵시문학으로부터 유래했다. 넷째, 예수는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시기에 대해 오해했으며, 그의 종말론적 기대는 환상에 그치고 말았다. 예수는 제자들의 전도 여행이 완료되기 전에, 인자(the Son of Man)가 임하시고 하나님나라가 도래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는 자기가 착각했으며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위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것은 끝내 오지 않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철저적 종말론은 바이스가 시작하고 슈바이처가 완성했다. 바이스는 종말론적 요소가 예수의 설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데 비해, 슈바이처는 설교뿐 아니라 예수의 전 사역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나라의 미래성만을 강조하고 그 현재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특히 슈바이처는 외형상으로는 예수의 전생애의 중심이 종말론이라는 철저적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종말을 묵시적 환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종말론을 파괴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이 의도한 바 없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위해 죽임을 당한 비극적인 인물에 불과했다."

 

Ⅳ. 실현된 종말론

슈바이처의 종말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종말론에 대한 논의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찰스 다드(Charles Harold Dodd, 1884-1973)이다. 그가 종말론을 예수의 교훈의 중요한 주제로 본 것은 슈바이처와 유사하나, 하나님나라를 미래적인 것이 아닌 현재적인 것으로 주장한 것은 슈바이처와 전혀 다르다. 그는 예수의 초림과 함께 하나님나라가 실현되었다고 하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제시했다.

  다드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어떤 것이 아닌 현재의 경험의 문제로 취급했으며,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그의 선언은 복음서에 분명하고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신약성서 저자들 역시 마지막 때가 이미 온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았다. 예수가 하늘로부터 사단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나(눅 10:18),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씀이나(요3:18∼19),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소유했다는 구절(요5:24) 등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다드는 "종말은 미래로부터 현재에로, 기대의 영역으로부터 실현된 경험의 영역에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다드는 「사도적 설교와 그 발전」(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에서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에 대한 성서적개념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종말론을 체계화했다. 이에 따르면, 구약성서에서는 주의 날이 미래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반해, 신약성서에서는 현재적 사건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나라가 실현되었음을 분명히했다. "신약성서 저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종말이 역사 속에 들어왔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통치가 계시되었다. 장차 올 세대가 도래했다. 원시 기독교의 복음은 실현된 종말론의 복음이었다.

  다드는 그리스도의 재림, 심판의 날, 새 땅등과 같이 신약에서 발견되는 미래 종말론적요소들을 교회가 예수의 재림의 연기를 설명하기 위해 유대인의 묵시문학으로부터 도입하여 나중에 첨부한 것으로 해석했다. 원시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적인 종말론으로부터 용어들을 빌려왔으나 그 내용에서는 전혀 달랐다. 하나님나라가 메시야의 오심과 더불어 실현되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예상 외로 지연되자, 신자들은 임박한 재림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잘못된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종말론의 재구성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가 미래 종말론이다. 그러므로 다드는 미래 종말론은 기독교 본래의 것이 아니며 후대에 유대묵시문학의 자료에 근거하여 재구성된 종말론으로 취급했다.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은 슈바이처의 철저적 종말론에 대한 반동으로 제시된 것이며 하나님나라가 전적으로 미래적이라고 주장한 일방적인 견해를 교정한 것이 그 중요한 공헌이었다. 그러나 다드 역시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을 전적으로 간과하고 그 현재성만을 일방적으로강조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현재적인 면과 미래적인 면을 동시에 증거하고 있는 성서적 종말론에 대한 적절한 설명으로서는 미흡한 것으로 평가된다.

 

V. 실존적 종말론

현재적 종말론을 더욱 강조하는 또 다른 접근방법을 제시한 사람이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이다. 당대에서 가장 탁월한 신약성서학자로 평가받고 있던 불트만이 자신의 신학적 과제로 삼았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대인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해결책이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이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이 신화의 형태로 되어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성서의 기록을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한 객관적 또는 문자적인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 저자들에게 실존적으로 일어났던 것을 신화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신화적 표현은 현대인의 복음 이해에 무의미할 뿐 아니라 방해가 되므로 비신화화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화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여 비신화화하는 것이다. 비신화화란 초월적인 것을 이 세상의 것으로 말하는 것이며 성서의 진리에 대한 당시의 해석을 현세의 해석으고 고치는 것이다. 불트만 자신은 비신화화를 "신화적 개념들 배후에 있는 보다 심원한 의미를 되찾으려고 하는신약성서 해석방법 이라고 정의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를 이해하고 재해석하기위한 적절한 도구로서 실존주의 철학, 특히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의 철학적 개념들을 사용했다.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이며, 성서 해석은 실존의 이해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

  한편 불트만은 종말론 역시 비신화화 작업의 일부로 취급했다. "예수의 종말론적 설교는신화적인 형태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 보존되고 계속되었다." 따라서 불트만은 하나님나라, 지옥,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의 개념을 신화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비신화화의 방법을 통해 실존적 종말론을 제시했다.

  실존적 종말론은 미래에 일어날 문자적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과 관계된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도래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 하나님이 최후심판을 함으로써 세상의 끝이 온다는 전통적인 종말론을 부정하고, 이를 개인의 수직적 위기와 심판으로 재해석했다. 인간은 순간 순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 영생의 가능성을 경험한다. 천국이나 지옥 역시 사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을 의미한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성서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본질적인 것은 세상의 끝이 매우 가까왔다는 신념이 아니다. 그메시지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개념과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개념이다. 실존은 인간의 본질이나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양식을 의미한다. 인간자체가 바로 실존이다. 그것은 또한 기존적인 것이 아니라 사건적인 것이다. 언제나 순간적인 결단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불트만은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를 현재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불트만은 이러한 실존적 종말론의 근거를 사도 바울과 요한에서 찾았다. 바울은 예수의 종말론적 설교의 비신화화 작업을 부분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옛 세상으로부터 새로운 세상에로의 전환점은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오심에서 일어난 현재의 경험이라고 선언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보내사···"(갈4:4). 그는 구원을 현재의 존재에관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부활 역시 현재적 경험이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전 15:54).

  불트만에 따르면, 그러나 바울에게는 아직도 장래의 우주적 사건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다. 이를 완전히 포기하고 현재에 일어난 종말론적 사건의 개념을 더욱 철저히 전개한 사람이 사도 요한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최후심판은 예수의 오심에서 이루어진 현재적 현상이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영생과 죽은 자의 부활도 미래적 사건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재의 경험으로 표현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5:25). 불트만에 따르면,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 오순절 성령 강림, 예수의 재림(parousia)은 하나이며 동일한 사건이다. 그리고 믿는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부활, 영생, 적 그리스도의 영의 도래와 같은 종말론적 실재들은 어떤 특정 사건이 일어났는가 여부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무시간적이며 실존적인 의미에서 참되기 때문이다.

  한편 불트만은 기독교는 항상 하나님나라가 가까운 미래에 임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헛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를들어, 그는 미래적 종말론의 주요한 근거인 마가복음 9장 1절, "내가 진실로 너회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을 예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 후세의 편집자가 첨가한 것으로 보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를 밝히기 위해 비신화화 방법을 사용했다. 그의 종말론의 특징은 종말의 미래적인 면을 완전히 부정하고 그 현재적이며 실존적인 면만을 강조한 것이며, 이것이 그의 종말론의 약점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종말론적 사건들의 실존적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들의 사실성을 간과했다. 따라서 불트만의 현재적 종말론은 그의 제자 케제만(E. Kasemann)을 통해 수정되었다. 그는 바울에 근거하여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을 양자 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고 전자를 후자의 구성 요소로 취급했다.

 

Ⅴ. 정치적 종말론

유대인 맑스주의 철학자 블로흐(Emst Bloch)의 영향을 받아 미래에의 희망을 전제로 정치적, 사회적 종말론을 발전시킨 사람이 위르겐몰트만(Wurgen Moltmann)이며, 이는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희망을 신학적 사고의 주제로 삼게 되었던 것은 몰트만의 개인적인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2차 대전 종료 후까지 영국군에 전쟁포로로 잡혀있었던 그는 희망을 간직한 사람이 생존 확률이 높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독일에 돌아온후, 몰트만은 신학공부를 하면서 희망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켰다. 특히 블로흐의 저서 「희망의 원리」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몰트만은 기독교인들에게 신구약 성서에서 증거되고 있는 희망의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외쳤다. 기독교인들은 희망의 주제를 재주장하여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몰트만은 종말론에 대한 기존의 취급 방법과 전혀 다른 자신의 입장을 제시합으로써 종말론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전통 신학이 종말론을 기독교 교의학 뒷부분에 놓거나 그것올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던데 반해, 종말론은 신학의 뒷전이 아니고 시작이어야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었다. 그는 종말론을 신학의 한 부분 또는 신학의 한 교리가 아닌, 신학의 전체로 간주했다. 기독교는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희망이며 앞을 향한 전망과 성취이다. 그것은 또한 현재의 혁신과 변화이다. 종말론적인 것은 기독교의 한 요소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매개체"이다. "이러한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그의 「희망의 신학」이다. 그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종말론을 독립된 교리의 일부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이 희망으로부터 시작을 하여 종말론적인 조명 아래 어떻게 그것의 테마들을 고찰할 수 있는가를 제시한 것이다.

  몰트만은 종말론을 기독교의 희망에 관한 학문으로 정의하고, 그것은 바라는 대상과 그 대상에 의해 일어난 희망 모두를 포함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에 대해 말하는것이며, 그 언어는 "이스라엘의 언어와 희망과 경험을 만들어냈던 약속"이다. 성경의 종말론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의 성취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종말론이 회랍적 의미나 현대의 경험 과학의 의미에서는 학문으로 가능할 수 없으며 다만 희망의 인식으로서 그리고 그 한도 내의 역사에 관한 인식으로서는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종말론적 메시지의 이해를 위해 신구약 성서에서의 약속의 의미를 검토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계시는 약속의 형식과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약속의 방식으로 그리고 약속의 역사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계시는 이 사건에서 현존하는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약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종말론적인 종류이다." 그는 계시들을 새롭고 역사적이며 종말론적 미래의 지평을 드러내는 약속들로 이해했다.

  한편 몰트만에 따르면, 약속은 어떤 사건 속에서 성취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미래를 가르쳐주는 잔여물이 있다. 구약성서를 통해 약속된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미래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미래를 향한 인류 역사의 움직임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그것이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희망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전제로 하고 있어 미래적 종말론이란 평을 듣는다.

  그에게는 하나님나라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다. 한편 그가 역사 내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강조한 점에서는 그의 종말론을 역사 내재적 또는 정치, 사회적 종말론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몰트만은 기독교인의 희망의 실현에 목표를 두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정치신학을 발전시켰다. 희망의 성취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미래의 도래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는 없다. 희망의 성취는 많은 부분이 인간의 노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신학은 이론의 신학이 아니라 행동의 신학이다. 그것은 왜 하나님이 세상의 악에 대하여 어떤 일을 하시지 않는가를 묻는 대신, 그 악을 변화시키려고 행동한다. 교회는 현 역사안에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며, 필요한 경우 어떤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여 현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몰트만은 역사 초월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을 거부하고역사 내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을 주장했다. 그의 공헌은 종말론을 교의학의 일부가 아닌 신학의 전체로 간주한 것과 종말을 역사화하고 사회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몰트만의 미래적 종말론은 희망과 미래에 대한 관심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Ⅶ. 마무리

필자는 독일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현대 종말론의 주요한 흐름과 학설을 살펴보았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기점으로 전개된 종말론은 하나님나라가 현재적이냐 아니면 미래적이냐 하는 것을 그 핵심 논제로 삼았다. 전술한 학자들이나 학설들은 이 문제를 양자 택일적인것으로 취급했다. 리출과 하르낙 등의 자유주의 신학,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 불트만의 실존적 종말론은 하나님나라를 현재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나, 바이스와 슈바이처의 철저적 종말론과 몰트만의 정치, 사회적 종말론은 그것을 미래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인 측면을 외면하고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한 반면, 철저적 종말론은 그것의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했다. 특히 몰트만은 종말론을 신학의 일부가 아닌 전부로 생각했으며, 불트만의 실존적 종말론은 하나님나라의 실존적인 면을 강조한 나머지 그 사실성을 간과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이러한 양자택일적인 종말론과는 전혀 다르다.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 모두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현재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 실존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는 영생과 심판의 현재적인 면과 미래적인 면 모두를 말했다. '내 말을 믿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따라서 종말론은 전적으로 미래에 속하는 것으로 혹은 이미 완성된 것으로도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벌써"와 "아직 아니"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사이의 긴장이 있어야한다. 미래적인 종말론이 동시에 현재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현재적 종말론이 동시에 미래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한편 종말론은 성경의 핵심적 교훈이며 신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따라서 리출과 하르낙과 같이, 종말론적인 요소를 알맹이가 아닌 껍질로 소홀하게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종말론은 기독교의 여러 교리 가운데 하나이지, 몰트만의 주장처럼 그것이 신학의 전체는 아니다. 따라서 전 교리 체계를 종말론으로 전환하거나 종말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신학을 왜곡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 주 (註) -

1. Albrecht Ritschl.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 (New York:Scribner, 1902). p. 13.

2. Adolf Harnark, What is Christianity?(New York:Harper & Brothers, 1957). p.51

3. Ibid., p. 52.

4. Ibid., pp. 54-55.

5. Ibid., p. 56

6. Ibid., p. x. 이것은 영문판 서문을 쓴 불트만의 지적이다.

7. Mi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vol. 3(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85). p. 1157.

8. 종교사학파는 1890년대 독일에서 괴팅겐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학파로서 세계 모든 종교를 역사 발전과정에 따라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과정을 역사, 지리적 환경에 근거하여 연구했다. 바이스는 저명한 신약성서 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마르부르그. 베를린, 괴팅겐, 블레슬라우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괴팅겐, 마르부르그,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신약성서 교수로 활약했다.

9. Johannes Weiss, Jes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London:SCM Press Ltd, 1971), pp. xiii, xi.

10.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유호준 역, 「개혁주의 종말론」(서울 :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6), p. 388.

11. Weiss, p. 8.

12. Ibid., pp. 8. 113-115, 132-135.

13. Ibid., p.93.

14. Ibid., pp. 84-92.

15. Ibid.. pp. 10, 73.

16. Ibid., pp. 10, 102-103.

17. Albert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London:Adam & Charles  Black, 1963), p. 349, Weiss, p. 31.

18. Albert Schwetizer, 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 : The Secret of Jesus Messiahship and Passion (London:Black, 1914), p.87.

19. Schwei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p.238.

20. Ibid., pp. 365-366.

21. Ibid., p. 357.

22. Hoekema, p.392

23.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New York:Charles Scribner's Sons, 1961), pp. 31-34. 다드는 눅 10:23-24,마 11:2-12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24. Ibid., p.34.

25. C. H.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ements (London:Hodder In Stoughton Limited,1956), pp. 84-85. 다드는 마12:28, 행2:16, 고후3:18.,5:17, 골 1:13등을 예시했다.

26.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pp. 114∼121. The Apostolic Preaching, pp. 36∼37.

27. Rudolf Bultmann, Jesus Christ and Mythology(London:SCM Ltd, 1966), pp. 15∼17. 불트만의 특히 신약성서의 전체 세계관이 신화적이라고 주장했다.

28. Ibid., p. 18.

29. Ibid., pp. 55, 57.

30. Ibid., pp. 32.

31.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vol.1(New York:Srribner, 1951). p.23.

32. Bultnlann, Jesus Christ and Mythology, p. 80.

33. Ibid., p. 32. 불트만, 「역사와종말론」(서을 :대한기독교서회, 1968), pp. 53-63.

34. Bultmann, Jesus Christ and Mythology,. p.33. 「역사와 종말론」, p.60.

35. Ibid.

36. Ibid., p. 14.

37. Jurgen Moltmann, "Hope and History", Theology Today 25, no.3(October, 1968), p.370.

38. Moltmann, Theology of Hope (New York:Harper& Row, 196f, p. 15. 「희망의 신학」(서을 :대한기독교서회, 1977), p. 14.

39. Ibid., p. 11, 「희망의 신학」, p.7.

40. Ibid., p. 224, 「희망의 신학」, p. 294.

41. Ibid., p.41, 「희망의 신학」, p.48-49.

42. Ibid., p.42, 「희망의 신학」, p. 51.

43. Ibid., p. 85, 「희망의 신학」, p. 102.

44. Ibid., pp. 194-197, 「희망의 신학」, pp.257-261

45. Hoekema, 「개혁주의 종말론」, p.427.

46. Horst G. PEhlmann, 「교의학」(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9), p.430.

47. Hoekerla, p. 428, E. H. Klotsche,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Grand Rapids : Baker Book House, 1979), p. 363.

48. Pohlmann, p.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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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NTL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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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2015. 6. 24. 14:02

먼저 한 학기동안 어려운 조직신학 강의를 저희의 눈높이에 맞춰서 열정 넘치는 강의를 해주신 윤기봉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교수님, 강의 정말 잘 들었습니다. 배움을 통해 앎이 넓어지고, 그 지식을 통해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사실 이번 학기 조직신학 강의는 입학 전부터 듣고 싶었던 과목이라 입학 시에 수강계획표를 짤 때도 무척 정성을 기울였던 생각이 납니다. 좁은 소견에 조직신학은 신학에 대한 기초지식을 갖춘 후에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성서신학 과목들을 먼저 듣고, 마치 맛있는 음식을 아껴서 나중에 먹듯 조직신학 강의를 3학년에 듣기로 계획하고 기다렸는데 이번 학기를 맞이해 얼마나 설레었는지요. 제가 왜 이토록 조직신학 강의를 기다려 왔냐면, 무엇보다 제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은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이시라는 이 신비가 제 인식의 틀 안에 들어오기에 너무 벅찼습니다. 기도할 때 어느 위격의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지라는 어린 아이 같은 호기심에서부터 성령께서는 어떤 분이신지와 같은 질문에 이르기까지 저는 조직신학을 통해 저의 많은 호기심들이 실타래 풀리듯 풀리기를 소원했습니다.

 

첫째 시간의 신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에서 신학과 신앙에 대한 소중한 분별을 배웠습니다. 신앙에 대한 성찰이 신학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학자이어야 한다는 가르침 그리고 신학학위가 살아있는 신앙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가르침, 감사합니다. 다른 평신도보다 더 많은 콘텐츠를 공부하다 보니 자칫 교만으로 빠질 수 있던 마음을 겸손하게 다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자칫 잘못하면 제가 속한 교회공동체를 비판하고 공격하기 위한 방법으로만 흐를 수 있는 신학의 위험성을 미리 일깨워 주셔서 제가 좋아하는 조직신학 과목이 본래는 교회를 세우는데 봉사하는 학문이란 본질을 깨닫게 해 주셨음도 감사드립니다.

 

첫 번째 주제로 접한 신론을 마치고 저는 이 시대가 역사에서 어떤 지점에 와 있으며, 기독교에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과학과 의학과 같은 기술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했던 모더니즘 시대가 한계 앞에서 실패하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기술을 대체할 신들(gods)을 찾는 시대가 되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마치 구약시대의 하나님과 이방신들 사이에서 방황했던 인간들로부터 헬라적인 다신론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알지 못하던 신(17:23)들을 경배하던 인간들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악한 영적세력의 역사적 실체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조직신학의 역할은 더욱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일반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음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는 언젠가 그분을 대신하여 영광과 심판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세상에 역설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신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논쟁은 재림의 구주인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그치지 않겠지만, 신론을 통해서 저는 조직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는 유익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삼위일체론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가장 기대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인식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아니, ‘벽에 부딪힌 느낌이 제 심정에 대한 더 가까운 설명일 듯합니다. 마치 원점을 중심으로 어떤 방향으로 그은 직선의 길이만큼 무지의 반대영역이 생긴 기분이랄까요? 새로이 알게 된 지식은 제가 그간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가, 얼마나 진리에서 벗어난 가르침들을 진리로 알고 있었던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 한편으론 오히려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을 통해 뭣보다 놀란 것은 삼위일체의 교리가 성경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 개념이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 공동체의 신앙,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성령의 임재로 인해 아버지도 아들도 아닌 인격적이고 신적인 실체를 또 다시 체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이 세 가지의 신앙이 예수의 신성에 관한 아리우스 논쟁을 거쳐 성령의 신성에 대한 논쟁을 통해 삼위일체론이 형성되는 과정까지 왔을 때에 저는 드디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완벽히 이해하고 싶다!’는 제 갈망이 실현되는 줄 알고 가슴까지 두근거렸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카파도기아의 세 교부들이 만든 삼위일체 정식은 마치 이거랑 이거는 오답이니 안 돼라는 네거티브적인 답안 같아서 실망했습니다. 더불어 본질과 위격에 대해선 어떤 영어단어를 모른다고 했더니 영영사전을 펼쳐서 보여준 기분이랄까요? 솔직히 아직도 뜬구름 잡는 것처럼 그 개념을 모르겠습니다. 또한 성령의 이중산출 개념은 성령께서 예수의 영(4:6)이라고 믿고 있던 제 인식에 더 큰 혼란을 불러 왔습니다. 그럼 성경이 언급하는 성령과 내가 매일 기도드릴 때 만나주시는 성령이 다른 영일 수 있다는 뜻인가? 아마 요즘에도 공의회가 열린다면 전 단죄 받을 소지가 다분하겠지요?^^ 제가 강의 이전에 삼위일체에 대해 배운 마지막 가르침은 어떤 집회에서였는데, 강사 목사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부부를 통해 설명하시더군요. 서로 별개의 인격체이면서도 한 마음과 한 몸의 관계가 되는 부부의 관계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격체가 아닌 인격이시기에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하지만 그나마 가장 비슷한 추론이라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맞는 것인지 강의를 듣고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혹시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교회 공동체에 빗대어 이해해도 되는지요? 우리 모두가 지체이지만 각자가 독립된 인격들이고 우리는 교회라는 본질에 속한 공동체이니까 말입니다. 이 질문은 쪽지를 통해서라도 교수님께서 답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디 저의 무지한 어둠을 배움의 빛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다음의 인간론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죄가 본질적으로 무엇을 파괴한 것인지와 원죄에 대한 바른 이해였습니다. 특히 공동체를 붕괴한 의미로서의 죄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죄를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나 막연히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해 추상적으로 접근하던 저에게 죄로 인해 우리가 성취해내지 못한 하나님의 의도로서 공동체로의 부르심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습니다. 왜 저는 그동안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이 사회적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교의학으로서의 조직신학이 아니었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것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부르심에 소극적으로 응답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더불어 성경은 죄책이 직접적으로 원죄에 기인한다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고 가르친다는 내용(17:9-10,2:6)을 배웠을 때 합리적인 공의의 하나님을 발견하여 만났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 효과적인 설득의 도구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천사론에 관한 시간은 부담 없이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저는 수퍼내츄럴이라는 미국드라마를 즐겨 시청했는데, 그 드라마엔 천사와 악마가 마치 역사의 주인인 것처럼 등장합니다. 미가엘, 가브리엘과 같은 익숙한 이름 외에도 무슨 엘하는 낯선 이름들이 난무하는 B급 드라마입니다. 성경적이지 않아서 어느 시점에서부턴 흥미를 잃고 보지 않았는데, 드라마 속에서 천사나 귀신들이 인간들을 해치는 장면들이 중세적 이해에 머무른 것임을 강의를 통해 알았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라 부담 없이 강의를 들었지만 마지막 결론에서 사탄이 여전히 삼킬 자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새삼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마지막으로 기독론은 교수님의 전공분야이시기도 해서 그런지 강의시간 내내 더 많은 에너지를 느꼈습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기독론을 통해서 저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그 폭과 깊이를 더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강의를 마칠 때마다 제가 새삼 느낀 것은 사실 제가 구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단편적인 차원에 그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관계 안에서 서로가 인격적으로 사귐을 갖고 있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서로를 전인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함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저는 지금껏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깊이 교감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분에 대해 아는 바가 체험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그분의 인식과 사역에 대해, 인간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 의미에 대해 이토록 깊이 있는 앎의 세계로 초청된 적이 있었을까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앎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를 고려해 보니 하나님께 감사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가르침은 마치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을 때의 행복감에 비할 정도로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 천년 전에 나사렛 예수께서 창세기부터 존재하신 분이며, 이후에 오실 왕의 왕이요 주의 주이시라는 사실이 단순하도록 명쾌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신비를 함의하고 있는지요! 왜 그동안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통합되지 못하고 단편적이었는지가 여기서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조직신학을 배우기 전과 배운 후를 저는 수영에 비유해 보고 싶습니다. 이전까지 이론적으로만 알고, 다른 사람들이 헤엄치는 것만을 지켜보았다면 이제는 제가 직접 물속에 몸을 담갔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직까지 원하는 대로 영법을 구사하지도, 자신감을 얻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부분에선 앎에 대한 기쁨이 넘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혼란이 가중되어 인식이 저만큼 멀어진 듯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차원에 접근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배울 조직신학가 기대됩니다. 그리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조직신학을 좀 더 깊이 배우고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그때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관해 더 깊이 깨달아 하나님의 사회성을, 공동체로의 부르심을 인간사회의 온전한 모델로, 관계의 기본 원리로 적용하고 제시할 수 있는 방법도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끝으로 이제까지의 짧지만 풍성한 한 학기의 여행을 교수님 덕분에 길 잃지 않고, 재미있게 함께 하였습니다. 이런 기회와 교수님과의 사제관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쉽지 않은 콘텐츠를 저희의 눈높이로 낮춰 주시고, 제가 다 알지 못하는 제한과 여건이 있으실 텐데도 불구하고 열정과 지성을 다해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 번 마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조직신학에서도 더 많은, 더 깊은, 더 바른 가르침을 청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영남사이버대학교 실용영어학과 3학년 김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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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2014. 8. 29. 17:27

성화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는 주로 관계와 위치, 소속을 나타내는 '카도쉬'라는 단어와 신약에서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평범한 것이 구별되는 것 또는 어떤 직임을 위해 따로 구별되고 제쳐놓는 것과 하나님의 봉사에 바쳐지기 위한 구별 혹은 성별을 의미하는 '하기아조'의 우리말 번역이다. 


고대 교부시대에는 성화론에 대해서 별로 언급되지 않았으며 주로 도덕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세례 전의 죄는 세례를 받음으로 제거되고 세례 이후의 죄는 회개와 선행으로 제거된다는 주장으로 이원론적인 경향이 보인다. 최초로 성화의 개념을 정의한 사람은 어거스틴인데 그는 칭의와 성화를 분명히 구분하지 않았으며 성화를 칭의에 포함시켜서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칭의와 성화를 잘 구분하지 않았고 칭의가 인간 영호에 무언가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은총이 주입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은혜는 'donum superadditum'(초자연적인 선물)이라고 불리는데, 이 은혜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알고 누리고 즐기는 천상의 운명에까지 도달하며, 이 초자연적 은총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덕으로부터 나오고 성례전에 의해 신자들에게 분여된다.   


성화론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위에 말한 관점에 근거하여 성화시키는 은혜가 영혼 속에서 원죄의 용서와 고유한 의의 항구적 습관을 나누어 주며 그 자체 안에서 보다 발전할 가능성과 완전성에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모든 것을 가진 새 삶으로 나아가는데, 이런 선행은 대죄에 의해 파괴되고 부효화될 수 있다. 세례 후의 죄책은 작은 죄의 경우 성찬으로 제거되고, 큰 죄는 고해성사로 제거될 수 있다. 이 모든 견해들은 성화보다는 칭의에 가까운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관념들은 트렌트(Trent) 회의 칙령과 신조들에 나타나 있다. 


성화에 대해 개혁자들은 자연과 초자연의 바탕이 아닌 죄와 구속의 안티테제(antuthesis)로서 성화를 강조한다. 그들은 칭의와 성화를 명백히 구분하였는데,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적 행위로서 인간의법적 신분에 영향을 주나 성화는 도덕적, 재창조의 사역으로서 인간의 내적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칭의 후에는 즉시 성화가 따른다고 주장한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단순히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먼저 말하고 두번째 은혜로서의 성화를 주장한다. 하나의 과정으로 성화를 말하지만 신자는 성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의해 성화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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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2014. 8. 25. 16:53




서방교회의 교부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인 어거스틴은 교회의 삼위일체적 사상에 관한 한 특별히 서방세계에서 독보적인 공헌을 하였다.  토마스 마쉬(Thomas Marsh)는 그의 기념비적인 책 「삼위일체」(The Trinity)에서 다음 네 가지로 어거스틴의 의도를 정리한다.

첫째, 어거스틴은 교회의 기본적인 삼위일체 교릴르 진술하고 설명하고자 한다.

둘째, 교회에서 가르치는 삼위일체 교리는 성서에 견곤하게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셋째, 만일 교회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면 지켜져야 할 인간의 언어와 논리의 특별한 규범을 세우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즉자적으로 알려진 창조의 최고 형체로서 인간의 사유나 정신 그리고 이들의 기원이며 창조자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흔적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 로저 올슨의 「삼위일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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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2014. 8. 24. 09:53






























안셀름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 제3장에서 “사람은 이생의 삶을 살았던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미래에 뒤따를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완전한 방식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면, 그는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 그가 얻게 되었을 그 상태에 회복되는 것이 마땅하겠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만약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가 가졌던 육체와 함께 영원히 썩지 않는 상태로 변형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회복될 때에 그는 그가 이 땅에서 살았던 그 육체와 더불어 회복되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인류 중에서 회복될 사람들에게는 이 일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러나 버려질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는 “만약 사람이 의로움을 끝까지 지켰다면 그는 그의 완전한 존재, 즉 영혼과 몸 모두 영원히 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불의함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유사한 방식으로 그가 영혼과 몸 모두가 영원히, 그리고 비참하게 되는 것이 가장 공정하고 적절한 일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안셀름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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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2014. 8. 24. 07:05



역사가는 과거를 서술할 때 무엇이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가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의존한다. 예컨대 그가 정치나 문화의 어느 한 측면을 선정해서 집중적으로 서술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인간 경험의 그러한 측면에서 무엇이 절정을 이루는지, 또 무엇이 쇠퇴를 이루게 되는지에 대한 어떤 판단을 선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류의 정치사를 고찰하면서 헤겔은 그가 살던 시대의 프러시아 국가에서 인류 정치사의 절정을 목격하였으며, 한 세대가 지난 후 메콜리는 당대의 영국 입헌제도에서 그 절정을 목격하였다. 사상과 행동에 관한 모든 판단은 이러한 묵시적인 전제를 토대로 한다. 어떤 판단의 기준, 어떤 목표관과 연고나시키지 않고서는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진보와 쇠퇴를 고찰할 수 없다. 그러한 기준, 그러한 목표가 널리 확산되어 있을 때, 그것들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관념이 갖는 추진력이 된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서술을 이끌어가는 좌표가 되기도 한다. 


-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모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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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2014. 8. 17. 07:44


신학적인 과제의 구상(conception)에 있어서 옥덴은 캅과는 현저히 다르다. 신학자로서의 옥덴은 규체적으로 기독교적 자원에 의존하면서 성서적 규범에 의해서만 안내를 받으려고 하고 있다.그가 화이트헤드의 범주를 활용하는 이유는 오직 이 개념이 신약성서의 증언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캅과 옥덴의 차이는 확실히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캅은 기독교인은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뛰너넘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옥덴은 기독교인의 사고와 행동을 위해서 인간의 규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속에 나타난 것은 어느 곳에서나 가능한 실존의 양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두 신학자들은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요소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캅에게는 없는 특수성의 요소가 규범적인 성격을 보유하는 옥덴에게는 있는 것이다. 

- 존 B. 캅, 「과정신학과 목회신학」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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