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기도문2021. 9. 18. 14:24

Dear Almighty God, who calls the world from the rising of the sun to the setting of the setting, and shines light in the completely beautiful Zion. We give thanks, praise and glory to God's great grace and love. On the morning of the seventeenth Sunday after Pentecost, please accept the worship of all churches around the world in spirit and truth in the Holy Spirit.

God the Father, who bestows grace and blessings on us and shines the light of the Lord's face on us. Through us, the whole world may know your will and all nations may know your salvation. Please give us the power to spread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and salvation to those who see but do not see and hear but do not understand.

The Son Jesus who said that these peopl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do it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This Chuseok, let the whole family gather in one place to give thanks and worship God for protecting the church and home throughout the year. Help us to become a family of mature faith that always fully obeys God's Word and glorifies God.

Dear Holy Spirit, You are the God who leads us not to crucify our lusts and greed with the flesh, not to be ostentatious, and not to quarrel or hate each other. Lead us to let go of our old habits and live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who has called us to be free. Help us to live as new people created by the holiness of righteousness and truth, serving one another with love, following the guidance of the Holy Spirit.

The Lord wants us to be full of the fruits of righteousness through Jesus Christ, 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Please accept the worship service offered by all holy catholic churches around the world today. Help us to be a church that is in unity and solidarity in its essence, is free in its non-essence, and gives love to all things. We pray in the name of Jesus Chris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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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9. 11. 13:45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성령강림 후 열여섯 번째 주일 아침에 성령 안에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모든 교회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오직 여호와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는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지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아버지 하나님. 코로나19로 인해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옵소서.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말씀하신 성자 예수님. 스스로 지혜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참다운 지혜와 총명이 가득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마귀의 시험을 잘 이기신 예수님에게 능력을 주셔서 갈릴리에서 거룩한 사역을 시작하도록 역사하신 성령 하나님. 어렵고 힘든 시험과 유혹을 잘 물리치고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아름답게 헌신하며 세상에서 거룩하고 빛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고 말씀하신 주님. 오늘도 전 세계 모든 공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본질에는 일치하고 연대하며 비본질에는 자유로운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전 3:11; 사 40:31; 눅 6:45; 눅 4:14; 계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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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9. 4. 12:17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성령강림 후 열다섯 번째 주일 아침에 성령 안에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모든 교회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오벧에돔과 그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셔서 자기들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이웃과 온 인류를 위해 아름답게 봉사하며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죄를 범한 사람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성자 예수님. 세상에 살면서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고 감싸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행한 잘못과 허물도 용서해 주시고 덮어주실 것임을 깨닫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용서해 주고 더 많이 덮어주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특별한 재능과 직분을 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잘 섬기며 유익하게 하도록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임을 믿고 교회 가운데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지체가 더욱 중요함을 깨달아 서로 도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 세워가게 하옵소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주님. 오늘도 전 세계 모든 공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본질에는 일치하고 연대하며 비본질에는 자유롭고 모든 것에 사랑을 베푸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성경 말씀 _ 삼하 22:26; 대상 26:8; 요 8:12; 고전 12:4-7; 고전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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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021. 8. 28. 22:10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든 나는 그 속에서,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진 삶의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 일이 일어난 삶의 형편과 상황에 대한 반응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을 원망으로 대할 것인지, 감사로 대할 것인지, 포기하고 주저앉을 것인지, 새로운 길을 찾아갈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1990년에 나는 시골의 아주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8월의 어느 날, 나는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몇 시간 동안의 뇌수술 후에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하다가 의식을 되찾기는 했으나 의사는 평생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 이제 내가 새로운 길을 가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얻은 상처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평생 말을 할 수 없다는데, 그렇다고 목회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나는 그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언어장애인들을 위한 목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대학 때 수화동아리에서 수화를 잠깐 배웠는데 이때를 위함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내가 잃어버린 것은 협상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순간에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상실로 인해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았고 절망과 포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내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선택했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아니 매순간마다 우리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그 고난이 주는 불편과 아픔을 밀어내지 않고 내가 얻은 상처와 잃어버린 그 무엇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고난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은 나에게 다시 말을 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처럼 다시 말을 시작한 나는 몇 년이 지난 후 조금 버벅거리기는 하지만 충분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비장애인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8월을 지나면서 지난 날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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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처받은 치유자이시군요.
    원망대신 신뢰를 택하시니 하나님의 긍휼하심도 경험하시고…

    2021.08.29 22:0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기독교영성2021. 8. 28. 21:18

믿음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이다. 믿음은 친밀하고 인격적인 신뢰를 통해 ‘주님의 강하신 사랑의 손에 저를 맡깁니다’하는 고백이다. 이러한 믿음은 근거 없이 무조건 내일은 더 좋은 날이 될거라고 믿는 낙관주의와는 다르다. "곧 불경기가 그치고 좋은 날이 찾아 올 것이다. 만사가 좋아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지만 이런 낙관론자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환경이나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변덕을 부리는 환경이나 상황과 자기자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세상이 온통 어둠에 덮여 있어도, 폭풍우가 몰려와서 다 휩쓸어 갈 것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미리 구체적으로 알아야 믿겠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알 수 없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이다, 우리를 수치 가운데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아직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 해결의 방법을 나는 모른다. 내 마음은 모든 것을 미리 다 알고 싶고, 이 상황을 내 힘으로 조종하고 싶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세밀한 부분까지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믿는 것이며 이 믿음에 대한 보상은 내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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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래전 자료를 찾다가 목사님 블로그에 들어가게 되어 구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눈팅만 하다가 인사드립니다😇

    2021.08.29 22:0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이렇게 찾아와 주시고 글까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2021.08.29 23:5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기도문2021. 8. 28. 17:42

의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며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성령강림 후 열네 번째 주일 아침에 성령 안에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모든 교회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고 말씀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루에도 수 많은 정보와 뉴스와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세상에 소리에 밀려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성자 예수님.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과 분리된 채 흑암과 저주와 죽음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붙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힘써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원하시는 주님. 오늘도 전 세계 모든 공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본질에는 일치하고 연대하며 비본질에는 자유롭고 모든 것에 사랑을 베푸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성경 말씀 _ 시 34:17,18; 사 55:3; 요 5:25; 히 9:14; 빌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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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매일 감사

    관리자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댓글입니다

    2021.08.29 22:04 [ ADDR : EDIT/ DEL : REPLY ]

신학일반2021. 8. 21. 16:55

오늘 우리가 쓰는 오순절이라는 용어는 구약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칠칠절’의 헬라식 표기이다. 이것은 구약을 헬라어로 옮긴 70인역에서 유래했다. 즉 레위기 23장 16절의 ‘오십 일’을 70인역에서 ‘펜테콘타 헤메라스’(pentekonta hemeras)로 옮겼는데, 여기서 ‘펜테콘타’는 ‘50’이라는 뜻이다.

칠칠절은 출애굽기 34장 22절에 처음 나오는 절기 이름으로 히브리어로 ‘샤부아(['Wbv’)이다. ‘샤부아’는 셰바([b'v)에서 유래했으며, '일곱(날, 년)의 기간, 일주일, 이레'를 의미하며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0회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샤부아는 항상 '어떤 일곱의 기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신명기 16장 9절에서는 7일의 기간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 다니엘 9장 24-26절과 27절에서는 모두 7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점은 문맥상 다니엘이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이 거의 끝나 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이렇게 칠칠절은 일곱 기간들의 절기(the Feast of Seven-Periods)이다.

미국의 유대인들은 지금도 종종 이 절기를 "샤부오스"라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의 발음은 "샤부오트"이다. 이 절기가 이 단어로 명명된 것은, 첫 열매를 드린 날로부터 일곱 째 안식일이 지난 "그 이튿날에" 이 절기를 시행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칠칠 기간이 지난 그 다음 날의 절기였다. 즉 '하미쉼 욤', 50일의 절기였으며-곧 'Pentecost'(오순절)로서 이 영어 단어는 헬라어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절기는 시완월 제 6일 즉 오늘날 우리의 달력으로는 5월 말에 있었던 이른 밀 수확에 의해 날짜가 정해졌다. 기독교인들은 오순절을 성령이 강림하신 날로 기억한다(사도행전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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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021. 8. 21. 15:56

이상직교수님은 "누가 믿는 자인가"라는 설교에서 "믿음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시작되며 어머니의 품은 믿음의 산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마 교수님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의 유산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신 기저에는 더 깊은 차원의 이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어머니의 생명을 나누어 받음으로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어머니를 신뢰하고, 이러한 신뢰를 기초로 다른 인격체에 대한 신뢰감이 생겨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수님의 이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교회에 다녀본 적이 없었고, 중학교 2학년 말부터 교회에 다닌 나에게 어떻게 믿음이 주어졌는지에 대해 늘 궁금해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믿음의 어머니가 되셨지만 나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신 분입니다. 나는 그 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압니다. 나를 위해서는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있는, 아니 기꺼이 포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그분에게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분에게는 그럴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그 분에게서 조건없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맹목적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그 분을 나는 그 어느 것보다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생각, 말, 행동, 그 어느 것도 나를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생각과 말이 혹은 행동이 비합리적이고, 상식적이지 않고,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분의 모든 것이 바로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결국 나는 그 분의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 분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나는 그분을 "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줌으로 믿음의 가장 큰 기초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고 교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란 서로의 운명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나는 이 말씀을 "믿음이란 서로의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이해했다고 적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말씀이 "믿음이란 서로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마 이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나에게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나를 위해, 나에게 나누어주신 분입니다. 그분의 그러한 사랑의 행위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신약성경을 통해 그 분의 생각과 가르침 그리고 여러가지 행동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이 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왜 그런 말씀을, 그런 행동을 하셨을까 궁금해 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행동들을 하셨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그러한 모든 일의 배후에는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바로 나를 향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나를 위해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포기하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나를 위해 포기하신 것입니다. 나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후, 나는 그 분의 품안에 머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품은 내 믿음의 산실이고, 나의 믿음은 그 분의 품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내 믿음은 나를 사랑하시는 그 분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에 눈이 멀어 나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보지 못하는 그 분을 압니다.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나만 보였고, 그래서 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셨던 그 분! 나는 그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내 믿음은 그 분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 그 분에게 나도 내 생명을 나누어 드리고 있습니다. 그 분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내가 그 분을 믿는 것처럼, 내 생명을 나누어 받은 그 분이 나를 믿으시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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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8. 21. 12:20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같이 서게 하시며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만나를 비같이 내려 하늘양식을 주어 먹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성령강림 후 열세 번째 주일 아침에 성령 안에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모든 교회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사막 같은 땅과 짐승이 울부짖는 광야에서도 택한 백성들을 자기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비민주적인 군부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미얀마와 사악한 이슬람 원리주의와 폭력에 기초한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을 온갖 위험에서 지켜 주시고 위로하여 주옵소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성자 예수님.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저희들도 예수님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아름답게 헌신하는 거룩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고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는 것과 다툼과 시기와 화내는 것과 당파심과 분열과 이단과 질투와 술주정과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을 이기며 살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도록 역사하시고 인도하신 주님. 오늘도 전 세계 모든 공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본질에는 일치하고 연대하며 비본질에는 자유롭고 모든 것에 사랑을 베푸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성경 말씀 _ 시 78:13-24; 신 32:10; 요 4:34; 갈 5:17-24; 딤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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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021. 8. 18. 08:09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나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 25:34).

우리 속담에 "형만한 아우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동생이 똑똑하고 잘한다고 해도 형에 비길바가 못된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습니다. 동생은 언제나 자기 욕심이나 주장을 굽히지 않고 형은 그런 동생에게 웬만하면 양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그동안 에서에게 많은 점수를 준 것 같습니다. 동생이 형이 되고 싶어하는 것을 아는 에서는 팥죽이 아니더라도 동생이 형노릇 한 번 해보라고 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쌍둥이 동생이니 말입니다. 아무리 동생이 형이 하고 싶다고 해서 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여하튼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네가 형이 되고 싶으면 형을 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형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만약에 동생 야곱은 형에게 산(?) 장자권이 정당하다면 그렇게 에서처럼 변장해서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받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샀어도, 그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에서로 변장해서 축복기도도 받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면 왜 아버지에게 자신이 형에게 장자권을 샀다고 떳떳하게 말씀을 드리지 않았을까요? 왜 형이 무서워 도망했을까요? 떴떳하고 정당하다면 말입니다. 

이런 야곱에 반해 형 에서는 역시 형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 집으로 돌아오는 동생 야곱을 보고 형은 그 동안에 쌓여있던 모든 서운함과 분노를 다 내려놓고 동생을 안아 주며 용서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야곱은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아니 장자의 명분이 그렇게 쉽게 팔리고, 바뀔 수 있는 것입니까?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는데, 동생이 형이 되고, 형이 동생이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느냐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이렇게 교활한 야곱편을 들고, 대범하고 정이 많은 에서에게 등을 돌리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정이 참 많은 민족입니다. 오랫 동안 결혼 생활을 지속해 온 부부들은 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정' 때문에 산다고들 합니다. 때로는 정치인들이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연결고리를 붙잡고, 정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습성도 결국 이 '정'때문이 아닙니까?

에서가 야곱에게 행한 일들을 모두, 우리 민족의  '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서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철부지이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교활한 동생 야곱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 가정의 불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에서의 편을 들지 않고 야곱의 편을 드는 것일까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조장하는 걸까요? 자기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남이 받을 복을 가로채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허용하는 것일까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남의 복을 가로채는 것도 허용이 되는 것일까요? 무조건 복을 받기만 하면 그 방법이나 수단이 어떻든지 간에 다 용서가 된다는 말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런 기독교를 믿지 않겠습니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만 하면 되는, 자신이 복을 받는 일이라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꿩잡는 게 매'라고 무조건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정당하게 취급되는 기독교라면 나는 그런 기독교를 믿지 않겠습니다. 아니 내가 믿는 기독교는 절대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모범은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입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잘못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는 에서가 '정'과 '이성'을 너무 구분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과 '사'는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은 사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장자'의 권한과 권리 그리고 그 의무는 공적인 거라는 것입니다. 사적인 것은 '정'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적인 것은 '정'보다는 '이성'에 기초해야 합니다. 세심하게  따져보고, 자세히 살펴보고, 선과 후 그리고 좌우를 고려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한 후에 결정해야 합니다. 

에서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사적인, 정에 치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천적인 복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빼앗기는 우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서의 약점을 이용해서 복을 빼앗은 야곱의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장자의 명분을 사기만 하면 바로 장자의 복을 받을 거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장자의 명문을 취한 이후 얼마나 큰 고난의 길을 걸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활한 야곱과 같은 사람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사로운 '정' 보다는 냉철한 '이성'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Posted by ANTL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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