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1. 10. 30. 22:51

옳은 일을 행하심으로 그의 위대함을 보이시고 의로우셔서 거룩하신 분으로 기림을 받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성령강림 후 스물세 번째 주일 아침에 성령 안에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모든 교회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가르침과 교권에 대항하여 확립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잘 계승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성자 예수님.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는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아름답게 헌신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지혜와 지식과 재능을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즐거움으로 순종하도록 이끄시는 성령 하나님. 불법과 악행, 망령되고 헛된 여러 가지 이론과 하나님에 대항하는 온갖 교만한 사상을 무너뜨리고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만을 기쁨으로 섬기며 예배하게 하옵소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주님. 오늘도 전 세계 모든 공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본질에는 일치하고 연대하며 비본질에는 자유롭고 모든 것에 사랑을 베푸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성경 말씀 _ 사 5:16; 신 6:5; 마 6:1; 사 11:2; 빌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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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2021. 8. 28. 21:18

믿음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이다. 믿음은 친밀하고 인격적인 신뢰를 통해 ‘주님의 강하신 사랑의 손에 저를 맡깁니다’하는 고백이다. 이러한 믿음은 근거 없이 무조건 내일은 더 좋은 날이 될거라고 믿는 낙관주의와는 다르다. "곧 불경기가 그치고 좋은 날이 찾아 올 것이다. 만사가 좋아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지만 이런 낙관론자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환경이나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변덕을 부리는 환경이나 상황과 자기자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세상이 온통 어둠에 덮여 있어도, 폭풍우가 몰려와서 다 휩쓸어 갈 것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미리 구체적으로 알아야 믿겠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알 수 없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이다, 우리를 수치 가운데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아직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 해결의 방법을 나는 모른다. 내 마음은 모든 것을 미리 다 알고 싶고, 이 상황을 내 힘으로 조종하고 싶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세밀한 부분까지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믿는 것이며 이 믿음에 대한 보상은 내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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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래전 자료를 찾다가 목사님 블로그에 들어가게 되어 구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눈팅만 하다가 인사드립니다😇

    2021.08.29 22:0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이렇게 찾아와 주시고 글까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2021.08.29 23:5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칼럼2021. 8. 21. 15:56

이상직교수님은 "누가 믿는 자인가"라는 설교에서 "믿음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시작되며 어머니의 품은 믿음의 산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마 교수님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의 유산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신 기저에는 더 깊은 차원의 이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어머니의 생명을 나누어 받음으로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어머니를 신뢰하고, 이러한 신뢰를 기초로 다른 인격체에 대한 신뢰감이 생겨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수님의 이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교회에 다녀본 적이 없었고, 중학교 2학년 말부터 교회에 다닌 나에게 어떻게 믿음이 주어졌는지에 대해 늘 궁금해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믿음의 어머니가 되셨지만 나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신 분입니다. 나는 그 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압니다. 나를 위해서는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있는, 아니 기꺼이 포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그분에게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분에게는 그럴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그 분에게서 조건없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맹목적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그 분을 나는 그 어느 것보다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생각, 말, 행동, 그 어느 것도 나를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생각과 말이 혹은 행동이 비합리적이고, 상식적이지 않고,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분의 모든 것이 바로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결국 나는 그 분의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 분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나는 그분을 "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줌으로 믿음의 가장 큰 기초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고 교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란 서로의 운명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나는 이 말씀을 "믿음이란 서로의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이해했다고 적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말씀이 "믿음이란 서로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마 이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나에게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나를 위해, 나에게 나누어주신 분입니다. 그분의 그러한 사랑의 행위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신약성경을 통해 그 분의 생각과 가르침 그리고 여러가지 행동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이 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왜 그런 말씀을, 그런 행동을 하셨을까 궁금해 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행동들을 하셨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그러한 모든 일의 배후에는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바로 나를 향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나를 위해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포기하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나를 위해 포기하신 것입니다. 나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후, 나는 그 분의 품안에 머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품은 내 믿음의 산실이고, 나의 믿음은 그 분의 품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내 믿음은 나를 사랑하시는 그 분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에 눈이 멀어 나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보지 못하는 그 분을 압니다.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나만 보였고, 그래서 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셨던 그 분! 나는 그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내 믿음은 그 분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 그 분에게 나도 내 생명을 나누어 드리고 있습니다. 그 분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내가 그 분을 믿는 것처럼, 내 생명을 나누어 받은 그 분이 나를 믿으시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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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021. 8. 18. 08:09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나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 25:34).

우리 속담에 "형만한 아우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동생이 똑똑하고 잘한다고 해도 형에 비길바가 못된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습니다. 동생은 언제나 자기 욕심이나 주장을 굽히지 않고 형은 그런 동생에게 웬만하면 양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그동안 에서에게 많은 점수를 준 것 같습니다. 동생이 형이 되고 싶어하는 것을 아는 에서는 팥죽이 아니더라도 동생이 형노릇 한 번 해보라고 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쌍둥이 동생이니 말입니다. 아무리 동생이 형이 하고 싶다고 해서 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여하튼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네가 형이 되고 싶으면 형을 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형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만약에 동생 야곱은 형에게 산(?) 장자권이 정당하다면 그렇게 에서처럼 변장해서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받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샀어도, 그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에서로 변장해서 축복기도도 받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면 왜 아버지에게 자신이 형에게 장자권을 샀다고 떳떳하게 말씀을 드리지 않았을까요? 왜 형이 무서워 도망했을까요? 떴떳하고 정당하다면 말입니다. 

이런 야곱에 반해 형 에서는 역시 형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 집으로 돌아오는 동생 야곱을 보고 형은 그 동안에 쌓여있던 모든 서운함과 분노를 다 내려놓고 동생을 안아 주며 용서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야곱은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아니 장자의 명분이 그렇게 쉽게 팔리고, 바뀔 수 있는 것입니까?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는데, 동생이 형이 되고, 형이 동생이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느냐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이렇게 교활한 야곱편을 들고, 대범하고 정이 많은 에서에게 등을 돌리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정이 참 많은 민족입니다. 오랫 동안 결혼 생활을 지속해 온 부부들은 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정' 때문에 산다고들 합니다. 때로는 정치인들이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연결고리를 붙잡고, 정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습성도 결국 이 '정'때문이 아닙니까?

에서가 야곱에게 행한 일들을 모두, 우리 민족의  '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서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철부지이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교활한 동생 야곱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 가정의 불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에서의 편을 들지 않고 야곱의 편을 드는 것일까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조장하는 걸까요? 자기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남이 받을 복을 가로채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허용하는 것일까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남의 복을 가로채는 것도 허용이 되는 것일까요? 무조건 복을 받기만 하면 그 방법이나 수단이 어떻든지 간에 다 용서가 된다는 말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런 기독교를 믿지 않겠습니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만 하면 되는, 자신이 복을 받는 일이라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꿩잡는 게 매'라고 무조건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정당하게 취급되는 기독교라면 나는 그런 기독교를 믿지 않겠습니다. 아니 내가 믿는 기독교는 절대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모범은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입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잘못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는 에서가 '정'과 '이성'을 너무 구분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과 '사'는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은 사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장자'의 권한과 권리 그리고 그 의무는 공적인 거라는 것입니다. 사적인 것은 '정'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적인 것은 '정'보다는 '이성'에 기초해야 합니다. 세심하게  따져보고, 자세히 살펴보고, 선과 후 그리고 좌우를 고려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한 후에 결정해야 합니다. 

에서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사적인, 정에 치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천적인 복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빼앗기는 우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서의 약점을 이용해서 복을 빼앗은 야곱의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장자의 명분을 사기만 하면 바로 장자의 복을 받을 거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장자의 명문을 취한 이후 얼마나 큰 고난의 길을 걸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활한 야곱과 같은 사람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사로운 '정' 보다는 냉철한 '이성'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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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눈2021. 8. 7. 20:41

지구에서는 중력장 때문에 모든 물체가 '아래'로 낙하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물체가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물체가 낙하하기 때문에 '아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아래'라는 개념은 지구가 가진 지역적 조건에 의해 정의된 것이며, 이 지역의 중력장에 의한 산물이고 효과이자 결과다. '아래'는 그저 '낙하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전'과 '후'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엔트로피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 엔트로피의 증가가 관찰되는 방향을 '시간'이라고 부를 뿐이다. 물체가 낙하하기 때문에 '아래'라는 개념이 생겨나듯,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아래는 '물체가 낙하하는 방향'이고 시간은 '열이 식는 방향'인 셈이다.

- 카를로 로벨리의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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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19. 8. 17. 21:02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영광이 땅에 충만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오순절 후 열 번째 주일 아침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영과 진리로 드리는 모든 교회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대로 행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게 하옵소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성자 예수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뜻을 저버리고 인간의 욕심과 육신의 안일함에 빠지는 잘못된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그날에 하늘에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노라고 말씀하신 성령 하나님. 우주와 인류의 역사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거룩하게 살게 하옵소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신 말씀하신 주님. 오늘도 전 세계 모든 공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본질에는 일치하고 연대하며 비본질에는 자유롭고 모든 것에 사랑을 베푸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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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19. 7. 6. 17:04

악을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믿는 자의 목숨을 지켜주시는 온 땅에서 가장 높으신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오순절 후 네 번째 주일 아침에 성령 안에서 진실하게 드리는 모든 교회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셔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고난의 긴 터널을 지나는 형제와 자매들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믿고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성자 예수님. 35년 동안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면서 수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과 사과는 커녕 수출규제 조치를 시행하여 또 다시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어리석은 일본 정치인들이 참회하고 반성하며 사과하게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성령 하나님. 나라의 경제와 교회와 가정의 필요한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기도함으로 순간순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사도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신 주님. 오늘도 전 세계 모든 공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본질에는 일치하고 연대하며 비본질에는 자유롭고 모든 것에 사랑을 베푸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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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19. 5. 25. 12:12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바람의 무게와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부활 후 여섯 번째 주일 아침에 성령 안에서 진실하게 드리는 교회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며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고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분이심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신 성자 예수님. 예수님을 주와 구원자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희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우리의 인격과 삶의 현장에서 생명과 구원의 물이 흘러나와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성령 하나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시는 주님. 오늘도 전세계 모든 공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본질에는 일치하고 연대하며 비본질에는 자유롭고 모든 것에 사랑을 베푸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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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19. 5. 10. 20:45

우리를 언제나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부활 후 네 번째 주일이며 한국교회가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오늘, 성령 안에서 진실하게 드리는 저희들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는 우리의 왕이신 아버지 하나님. 어리석은 자들은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하면서 부패하고 가증하며 선을 행하지 않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언제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성자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먼저 우리가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며 부모님을 잘 공경하고 섬김으로 땅에서 잘되고 장수의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오늘도 변함없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 죄 사함 받은 은혜와 구원받은 그 기쁨을 다시 회복하게 하시고 주님만을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했던 그 다짐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우리의 마음과 시간 그리고 물질을 드려 헌신하며 성령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순종하게 하옵소서.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주님. 오늘도 전 세계 모든 공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본질에는 일치하고 연대하며 비본질에는 자유롭고 모든 것에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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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신학2019. 4. 4. 09:2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3)

본절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모세 시대 이전에도 알려졌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학자들의 답변은 엇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창세기에서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른 학자들은 창세기에서의 이 용어의 출현이 후대의 첨가라고 제안한다. 창세기의 몇몇 절에서 '여호와'라는 용어가 좀더 초기의 하나님 칭호를 대체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해도(예를 들어 16:11, 13), 이것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예를 들어 15:7; 22:14). 그러나 하나님의 다른 이름, 특별히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는 족장들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주장과 관련해서 이 언급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곧 떨기나무 한가운데서 나타나셔서 여호와가 모세에게 자기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계시해 주신 것만큼(출 3:1-22), 족장들은 여호와의 본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출 3:12-15에서 여호와는 자기에 대해서 모세에게 더욱 심오하게 알려 주신다. 그러면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3:12)고 약속하시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칭호로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밝히신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며, 또한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 주신다. 그래서 이 단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세 번이나 언급된다. 곧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분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여호와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행하실 것이다. 

  •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할 것이다(6절).

  • "(나는)  너희를 내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7절)

  •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8절) 

 

- 참고 : IVP 성경주석 구약, ESV 스터디 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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