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름다운 시

나는 누구인가?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서는 천박하게 우는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일은 없다  (0) 2015.01.26
정호승, '결혼에 대하여'  (0) 2014.09.02
꽃과 빵  (0) 2013.08.02
윤동주의 '십자가'  (0) 2013.07.31
내 작은 소망으로  (0) 2013.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