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일반2021. 8. 21. 16:55

오늘 우리가 쓰는 오순절이라는 용어는 구약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칠칠절’의 헬라식 표기이다. 이것은 구약을 헬라어로 옮긴 70인역에서 유래했다. 즉 레위기 23장 16절의 ‘오십 일’을 70인역에서 ‘펜테콘타 헤메라스’(pentekonta hemeras)로 옮겼는데, 여기서 ‘펜테콘타’는 ‘50’이라는 뜻이다.

칠칠절은 출애굽기 34장 22절에 처음 나오는 절기 이름으로 히브리어로 ‘샤부아(['Wbv’)이다. ‘샤부아’는 셰바([b'v)에서 유래했으며, '일곱(날, 년)의 기간, 일주일, 이레'를 의미하며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0회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샤부아는 항상 '어떤 일곱의 기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신명기 16장 9절에서는 7일의 기간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 다니엘 9장 24-26절과 27절에서는 모두 7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점은 문맥상 다니엘이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이 거의 끝나 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이렇게 칠칠절은 일곱 기간들의 절기(the Feast of Seven-Periods)이다.

미국의 유대인들은 지금도 종종 이 절기를 "샤부오스"라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의 발음은 "샤부오트"이다. 이 절기가 이 단어로 명명된 것은, 첫 열매를 드린 날로부터 일곱 째 안식일이 지난 "그 이튿날에" 이 절기를 시행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칠칠 기간이 지난 그 다음 날의 절기였다. 즉 '하미쉼 욤', 50일의 절기였으며-곧 'Pentecost'(오순절)로서 이 영어 단어는 헬라어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절기는 시완월 제 6일 즉 오늘날 우리의 달력으로는 5월 말에 있었던 이른 밀 수확에 의해 날짜가 정해졌다. 기독교인들은 오순절을 성령이 강림하신 날로 기억한다(사도행전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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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일반2020. 7. 24. 14:20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에는 각 책 마다 장과 절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장과 절이 기록할 때 저자가 구분하고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어떤 과정을 거쳐 장과 절이 삽입이 되었는지 궁금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실 신약성경의 로마서 이후 서신서들은 모두 편지인데 편지에 장과 절을 구분해 놓았을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장과 절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본문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장과 절 구분이 있기 전부터 일찍이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에도 문단 구분이 나타납니다. 마소라 본문 사본을 보면, 시편을 제외한 구약 전체가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두 종류의 문단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린 문단(프툭하 open paragraph)이고 다른 하나는 닫힌 문단(쓰투마 closed paragraph)입니다. 열린 문단이란 완전히 행(行)을 바꾸어서 쓴 새로운 문단을 일컫는 것으로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문단과 같은 것입니다. 닫힌 문단이란 같은 행 안에서 몇 자를 띄어서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는 것으로 앞 문단과 뒤 새 문단이 행으로 구분되지 않고 몇 자를 띄운 공간으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에는 452개의 쎄다림(Sedarim)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쎄데르는 순서(order), 혹은 차례(sequence)를 일컫는 말로, 문단보다는 더 큰 단위로서 단원(section)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세다림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래한 것으로 토라를 삼 년에 다 읽도록 매주 읽을 분량을 쎄다림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토라를 일 년에 독파(讀破)하도록 단원을 구분하였는데 이것을 파라쇼트(Parashoth)라고 합니다. 토라는 모두 54 (혹은 53) 파라쇼트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절 구분은 이미 탈무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바빌로니아 전통과 팔레스타인 전통이 약간 다릅니다. 장 구분이 숫자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경입니다. 장 구분의 체계는 일찍이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1150-1228)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을 14세기에 라틴어역 불가타가 받아드림으로써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신약성경의 장절 구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의 장절은 파리의 유명한 인쇄업자 스테파누스(1503-1559)의 [그리스어 신약]에서 처음 보입니다. 1551년에 제네바에서 나온 스테파누스의 [그리스어 신약] 제 4판은 숫자로 절 구분이 되어 있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으로 유명합니다. [제네바성서](1557/1560)는 영어성서로서는 처음으로 절 구분이 되어 나온 성경입니다. 로버트 에스티엔 (Robert Estienne)이 그의 [그리스어 신약전서]에 적용했던 절 구분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땅(Olivetan)으로 알려진 삐에르 로버트(Pierre Robert)가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하였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빈이 서문을 썼습니다. 1553년에 인쇄업자 스테파누스 (Robert Stephanus 일명 Robert Estienne)가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에 장과 절을 구분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제네바성서]의 신약은 1557년에 나옵니다. 신.구약전서가 다 번역되어 나온 것은 1560년입니다. 이것이 로마자로 인쇄되고 절 구분이 된 최초의 영어 성경전서인 [제네바성서] 초판입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의 장과 절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를 보시면, 출애굽기 7장 26-8장 끝까지의 장절 구분에 이중의 표기가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장절 표기 방식을 함께 나타내준 것으로 히브리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의 장절 구분이 다르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시편의 경우에는 소제목 부분을 1절로 표시하는 경우와(독일어 루터 성경 참조), 소제목으로 보고 절로 구분하지 않는 경우에(성경전서개역한글판 참조) 따라서 절 수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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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일반2019. 2. 21. 17:47

21세기 대표적인 복음주의 사상가요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그의 저서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에서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1. 경건과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 특별히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대속적 죽음에 초점을 둔다.

2. 영성과 교리와 윤리에서 성경이 궁극적인 권위를 갖는다.

3.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적 체험으로서 회심(conversion) 혹은 '새로운 탄생'에 강조점을 둔다.

4. 신앙의 나눔, 특히 복음 전도에 관심이 높다. 


출처 : 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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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일반2017. 3. 24. 22:46

성경의 장과 절

 

구약의 장, 절 구분

1) 열린 문단, 닫힌 문단

구약 히브리어 본문의 장과 절 구분이 있기 전부터 일찍이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에도 문단 구분이 나타납니다. 마소라 본문 사본을 보면, 시편을 제외한 구약 전체가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두 종류의 문단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린 문단(프툭하 open paragraph)이고 다른 하나는 닫힌 문단(쓰투마 closed paragraph)입니다. 열린 문단이란 완전히 행()을 바꾸어서 쓴 새로운 문단을 일컫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문단과 같은 것입니다. 닫힌 문단이란 같은 행 안에서 몇 자를 띄어서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 문단과 뒤 새 문단이 행으로 구분되지 않고 몇 자를 띄운 공간으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2) 세다림 (Sedarim)

구약 본문에는 452개의 쎄다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쎄데르는 순서(order), 혹은 차례(sequence)를 일컫는 말입니다. 문단보다는 더 큰 단위로서 단원(section)에 해당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토라를 삼 년에 다 읽도록 매주 읽을 분량을 쎄다림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토라를 일 년에 독파(讀破)하도록 단원을 구분하였는데 이것을 파라쇼트(Parashoth)라고 합니다. 토라는 모두 54 (혹은 53) 파라쇼트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절 구분은 이미 탈무드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전통과 팔레스타인 전통이 약간 다릅니다. 장 구분이 숫자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경입니다. 장 구분의 체계는 일찍이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1150-1228)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을 14세기에 라틴어역 불가타가 받아드림으로써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약의 장절 구분

파리의 유명한 인쇄업자 스테파누스(1503-1559){그리스어 신약}에서 처음 장절 구분이 보입니다. 1551년에 제네바에서 나온 스테파누스의 {그리스어 신약} 4판은 숫자로 절 구분이 되어 있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으로 유명합니다.

 

{제네바성서}(1557/1560)는 영어성서로서는 처음으로 절 구분이 되어 나온 성서입니다. 로버트 에스티엔 (Robert Estienne)이 그의 {그리스어 신약전서}에 적용했던 절 구분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땅(Olivetan)으로 알려진 삐에르 로버트(Pierre Robert)가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하였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빈이 서문을 썼습니다. 1553년에 인쇄업자 스테파누스 (Robert Stephanus 일명 Robert Estienne)가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에 장과 절을 구분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제네바성서}의 신약은 1557년에 나옵니다. .구약전서가 다 번역되어 나온 것은 1560년입니다. 이것이 로마자로 인쇄되고 절 구분이 된 최초의 영어 성경전서인 {제네바성서} 초판입니다.

 

장절 구분의 차이의 예

공동번역 성서를 보시면, 7:26-8장 끝까지의 장절 구분에 이중의 표기가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장절 표기 방식을 함께 나타내준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의 장절 구분이 다른 것입니다.

 

절 수의 차이의 예

시편의 경우에는 소제목 부분을 1절로 표시하는 경우와(독일어 루터 성경 참조), 소제목으로 보고 절로 구분하지 않는 경우에(성경전서개역한글판 참조) 따라서 절 수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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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일반2015. 1. 26. 20:16

1.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면 구원받은 건가요?


기독교를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역사적으로 2천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33년을 살았던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그리스도(구원자)로 믿는 종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바로 “예수를 구원자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는다’는 말이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다음의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데,  ‘사실에 대한 인정’으로 역사적 예수가 구원자라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성적 신뢰의 행위’와 자신의 감정과 의지로 그 분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으로 ‘의지적 신뢰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한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자로 인정하면서 그 분을 신뢰하지 않거나, 자신을 그 분에게 맡기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결혼한 부부가 서로를 배우자로 인정하면서도 서로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 수 있습니다. 




2. 한 번 회개하면 천국에 가는 건가요? 아니면 조상의 모든 죄까지 철저히 회개해야 천국에 가는 건가요?


회개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기 전에 하는 회개와 예수를 믿은 후에 하는 회개인데, 예수를 믿기 전에 하는 회개는 그 동안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고 살았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고, 예수를 믿은 후에 하는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지 못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마음 속에 있는 죄를 비워내는 것이고, 그 빈 마음에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믿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천국에 간다’는 말과 ‘구원받는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조상의 죄는 회개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명기 24 16절에는아버지는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사람은 자기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 몇 해 전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끓어야 산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3. 샤밧예배가 금요일 해진 이후 드리는 예배인가요? 이때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러 오시나요?


‘샤밧’이라는 말은 안식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런데 복음적인 정통 기독교 교회는 안식일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교회는 지난 2천년 동안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첫번째 질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이기 때문에, 예배를 비롯한 모든 교회의 예식이 예수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샤밧 예배’라는 말은 정통 기독교 교회에는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편재성(omnipotence)이라는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은 동시에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특별히 우리를 만나주시러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집회나 교회에서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이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의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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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일반2015. 1. 25. 00:02

종교 간의 대화에 대한 개혁신앙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유일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신-인이요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대속의 주님이시라는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인 "신-인(God-Man)"이며, 죄인들이 받아야 할 죄의 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고 죽으신 "대속제물"이시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그리스도의 보편성이란 어느 한 민족이나 인종에게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적용되는 걳이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종과 경제적 차별을 뛰어 넘는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벧후 3:9).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지만, 이 초대에 응답하면 누구나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인종적, 경제적, 혹은 성별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개혁신앙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보편성의 의미이다.


- 이상직, "종교다원주의의 도전에 대한 개혁신학의 대안"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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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일반2015. 1. 24. 23:50

바이엘하우스가 지적했듯이 종교간의 대화의 주된 관심은 이제 더 이상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실용주의적인 것, 즉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및 생태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할 수 있는 영적이며 윤리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적인 전제보다는 방법론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고, 교리적인 면들은 공개적으로 토론되기보다는 묵계적으로 취급되는 것이 당연시되어 왔다. 


- 바이엘하우스, "복음의 권위와 종교간의 대화"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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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일반2014. 12. 6. 22:57

윤리학은 경험을 전제로 한다. 학문적 윤리학의 최초의 저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각자는 다만 그가 아는 것을 올바르게 판단하며, 그리고 그 안에서 좋은 재판자이다. 하나의 결정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그 대상 안에서 관계된 자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사람은 정치적 학문에 대하여 적절한 청문자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삶의 실제적 현장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단은 바로 이러한 데서 나아가며 이러한 것을 취급한다. 열정을 추구하려고 기울이는 관심은 멀게 된다. 그리고 그 목표는 여기서 인식이 아니라 행동에 있기 때문에 목적과 유익없이 경청하게 될 것이다. 나이가 젊든지 또는 성격에서 미성숙이닞는 물론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결핍이 시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열정으로 살며 그걳을 각자는 개별적으로  힘쓰는데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대략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자들처럼 아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결실 없는 것이다. 이성에 따라 그의 노력을 기울이고, 그것에 적합하게 행동하는 자는 이러한 사물들에 관하여 안다는 것이 그를 위해 다양한 유익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 헤닝 슈리어, 「개신교 신학 연구 개론」 대한기독교서회,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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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일반2014. 9. 28. 06:43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저절로 자라는 식물에 비유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너무 많은 일을 벌려놓고 일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일을 해야만 이 땅 위에 건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우리의 일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실상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 교회의 분열이 생기는 것도 일을 너무 많이 하려고 하다가 생기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이 하나님 나라와는 별로 무관한 일들을 너무 많이 벌려놓다가 결국 스스로 지치고 서로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서두르지 않고 , 너무 안달하지 않고 기다리며 인내하는 삶의 자세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흑과 백의 논리로 모든 것을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야만 만족하는 우리는 여유를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교회는 뿌려진 한 알의 씨앗처럼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벽돌이나 죽은 나무처럼 차디찬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라야 할 사명이 있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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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일반2014. 8. 27. 15:41

1. 디도서는 어떤 책인가?

흔히 디도서를 디모데전서, 후서와 함께 목회서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서신이라는 말은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디도서와 디모데전후서가 모두 교회에서 양을 치는 것에 다루었다고 말한 것에 기인하며, 이 말이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1726년 독일의 안톤(Paul Anton, 1661-1730)에 의해서였다. 디도서는 교회사 초기부터 교회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로마의 클레멘트의 '고린도에 보낸 편지'(A.D. 96 s 년경)와 이레네우스의 '이단론'(A.D, 130년경) 그리고 저스틴(A.D. 150년경)과 무라토리 문서(A.D. 180-200년경)에 디도서를 인용하고 참고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본 서는 저자가 바울이라고 밝히고 있으며(딛 1:1) 수신자인 디도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신앙을 갖게 된 듯하다. 디도의 이름은 신약에서 열 세 번 나오는 데 갈라디아서에 두 번(2:1; 2:3), 디모데후서에 한 번(5:10), 디도서에 한 번(1:4), 고린도후서에 아홉 번(2;13; 7:6, 13, 14; 8:6, 16, 23; 12:18) 등이다. 



2. 바울이 디도서를 쓴 목적

신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디도에게 편지를 쓴 사실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본 서를 기록한 때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한 때 바울이 디도와 함께 그레데 섬에서 전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바울과 디도가 전한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으며, 소규모의 신자들의 모임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바쁜 일정 때문에 그레데 섬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두어 신자들의 모임을 책임지도록 했다. 당시 그레데의 공동체들은 행정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 유대주의 성격이 강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사도의 올바른 가르침을 흐리게 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공동체를 섬기는 디도에게 바울은 목회 사역에 대한 지침을 제공해 주고자 본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울이 디도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지침은 첫째, 이단의 가르침을 논박하며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는 것(1:15)과 둘째, 윤리적인 생활과 바른 신앙을 입증한 경건한 실제 생활을 가르치고, 공동체 안의 각 연령층의 남녀 신자들을 지도할 때 참고할 구체적인 지침들(2:1-10)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것에 관한 것들이다.


3. 디도서의 내용

 1) 교회 행정에 관한 지시(1:1-16)

   (1) 인사말(1:1-4)

   (2) 장로 임명의 지침들(1:5-9)

   (3) 이단을 경계할 것(1:10-16)

 2) 교회 각층에 대한 교훈(2:1-15)

 3) 사회 생활에 관한 교훈(3:1-15)

   (1) 사회 생활에 대한 태도(3:1-7)

   (2) 이단자에 대한 태도(3:8-11)

   (3) 결론(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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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NTL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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