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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사이버대학교

선교신학을 수강하고...

선교신학을 수강하고

 

4학년 김형빈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이번 학기에 윤기봉 교수님의 선교신학 강의를 듣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해 좀 더 큰 그림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돌이켜 보면 저에게 선교와 전도는 여전히 그 어감만으로도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힘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의 대위임령이 제 삶에 어떤 결과로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평신도로서 교제권 안에 있는 모태신앙들 중 못해 신앙들을 상담하고, 격려하면서 그들을 제자로 양육하는데는 관심이 많았지만 교회 담장 너머의 영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미미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학기 선교신학 강의를 신청하면서 이 강의가 끝날 때 즈음엔 달라진 마음의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수님의 강의는 행동 이전에 원인과 명분으로써 존재하는 인식의 차원에 새로운 앎을 주셔서 행동의 변화에 도전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껏 선교와 전도에 대해 몰랐기에 부담스러웠고, 못했기에 부정적으로만 인식했던 것이지 그 무지의 차원을 넘어서면 마음에 도전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퍼스펙티브스의 선교에 대한 4가지 관점은 이런 체계적인 인식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경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이라는 시간을 관통하는 통시적 주제와 문화적 관점과 전략적 관점이라는 지역과 시대를 아우르는 공시적 주제를 통해 선교에 대한 인식의 기본 틀을 잡고 배움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경적 관점에 대해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대위임령(28)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습니다. 대위임령이 순종해야 할 명령이 아닌 신뢰해야 할 약속이라는 가르침은 저의 부담이 바로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하고 제 개인의 능력으로 감당하려 했던 교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의 능력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선교와 전도에 마음을 열고 감당할 힘도 주실 터인데, 이제껏 그런 이해 없이 숙제처럼만 인식을 하다 보니 피하고만 싶었던 것이지요. 저의 무지함과 교만함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도, 그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주체도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십자군 전쟁을 바이킹의 후예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교회사를 공부하면서도 이 부분은 알지 못했었는데, 이제야 왜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그처럼 잔혹한 수단으로 선교를 정당화한 것인지에 대해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전쟁이 남긴 뼈아픈 교훈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끊임없이 세상과 교통하면서 문화를 주고받는데, 우리가 분별하는 지혜를 잃었을 때 얼마나 참혹한 역사적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 실수가 오늘날의 IS테러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고려할 때에 교회의 역사적 실수는 한 시대에 그치지 않는 것임을 각인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 할 사명인데, 지나온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국주의 시대에 탐욕을 선교로 치장하고 잔혹하게 식민지를 확장한 역사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의도가 선해 보이든, 명분이 합당해 보이든 그 중심이 거짓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의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역사적 관점 안에서 또 저의 관심을 끈 것은 바로 살아있는 접촉동질집단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일상적인 접촉을 넘어선 살아있는 접촉을 통해서만 선교의 대상 종족 안에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그 사회 안에서 생명력 있는 운동을 시작해 회심운동으로까지도 이어진다는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최근에 동남아 지역과 중국의 오지에 선교를 나가신 선교사분들의 전형적인 선교형태를 알고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계신 곳은 기독교의 복음전파가 법적으로 제한된 곳이므로, 복음을 전파하거나 교회를 개척하지 못하고 가정집 안에 성경공부 모임을 열어 공부방 형태의 신학교를 운영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선교후원비의 상당금액이 자녀들의 교육비에 지출된다는 사실이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왜 그토록 오랜 기간 사역을 하면서도 열매가 적을까에 대한 납득은 되는 역설적인 일이었지요.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대로 한복판에서 복음을 전하다 바로 체포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은 합리적인 전략은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주어진 여건 안에서만 움츠리고 있다면 어떤 열매가 있을까요? 퍼스펙티브스에서 언급한 문화적 관점과 전략적 관점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전형적인 선교형태를 벗어나 중국 오지에서 선교하시는 다른 선교사님과 북한 인근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 두 분의 사역은 그래서 더 신선했고 선교후원의 동기를 자극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은 동질집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들의 교회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양육하는 방법은 달리하셨더라구요. 신학교를 세워 목회자 후보생을 양성하기만 하는 사역은 지양하고, 현지인들과 같은 직업을 병행하며 자신의 교회를 개척해 목회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교회가 성장하자 현지인 사역자들이 궁금해하며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더랍니다. 자신들의 교육부터 교회개척을 포함해 모든 걸 후원으로만 이룬 현지인 사역자들은 이 선교사님께서 당연히 목회의 시스템을 시연하고 사람들을 모아줄 것으로 기대했답니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그런 시스템 안에서 양육돼 자립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선교사님이 사람들을 모아주면 관리나 하려는 안일함으로 도움을 청했는데, 선교사님은 현지인 사역자들에게 조언만 해 주시고 모든 걸 직접 감당하게 시키셨답니다. 그리고는 쿨(?)하게 돌아오셨다네요. 놀라운 건 현지인 사역자들이 한계에 부딪히자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요청했고, 자신들이 직접 전도를 해서 생명의 결실을 맺자 그 기쁨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지적하신 한국 선교사님들의 전략적 실패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만 급급했지, 교회의 개척에서부터 자립에 이르기까지의 행정을 비롯한 목회의 실제적인 가르침이 전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선교사님들 대부분이 현지인 사역자들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해보신 경험이 많지 않기에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수확했지만, 이를 유통시키고 소비자에게 구매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장사의 수완은 농부의 기술과는 별개의 영역인 것입니다. 목회는 이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하기에 그 선교사님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북한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은 북한과 인접한 러시아 영토를 일부 장기임대 받아서 그 곳에 대규모 농장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필요한 인재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국내 교회들과 협력하는 한편 탈북자들을 농장운영에 참여시켜 그들의 삶의 터전도 확보하고 신앙교육도 병행해 영육 간에 자립할 수 있도록 사역하고 계셨습니다. 아울러 농장에서 생산한 농작물과 지원받은 종자들을 북한에 공식적인 루트로 제공하며 선교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도 하고 계셨습니다. 위의 두 분은 선교대상에 대한 문화적 이해와 전략적 접근이 탁월한 사례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번 학기에 선교신학 강의를 들으며 선교에 대한 기초적인 신학을 배울 수 있었고, 현지 선교의 귀한 사례들을 접하며 선교현장의 어려움과 가능성도 동시에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선교는 저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며, 이제 저는 어떻게 선교를 삶 속에 실천해야 할까요? 이번 학기를 통한 배움을 바탕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선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습니다. 선교는 내면으로만 수렴하려는 저의 이기적인 본성을 그리스도께로 방향을 돌려 스스로 설정한 울타리 밖으로 발산시키는 이타적인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접한 성경의 가르침은 가족과 교회공동체에만 머물렀던 관심을 그 이상으로 확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리스도를 의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저에게는 소명이 있습니다. 세상의 작은 절반(25세 이하의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을 교육이란 영역을 통해 하나님께로 인도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저는 제가 30억이 넘는 그 인구와 전 세계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언어와 시공간의 한계를 딛고 모든 지역에, 모든 대상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소명 또한 선교이기에 저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다듬는 자기계발과 축적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겠지요. 전 그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께 구하려고 합니다. 지혜로 계시되신 그리스도(8, 고전1:30)만이 제게 주신 소명을 성령 안에서 이루실 테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선포하신 약속을 마침내 성취하시는 그리스도(1:8)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소명은 전 세계에 닿아 있지만 능력과 생각의 범위는 울타리 안에만 머물렀던 괴리감에서 이제 자유함을 느낍니다. 돌이켜 보니 이번 학기는 소명을 위해 선교로 이끄시는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확신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