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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사이버대학교

기독교사상사를 듣고 나서

기독교사상사를 듣고 나서

 

1학년 김학진

 

기독교사상사는 수강신청을 할 때부터 제 마음에 부담을 주는 과목이었습니다. 마치 헬라어, 히브리어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의 이야기인데, 뭔가 낯설고, 남의 이야기 같고, 여기 저기 난무하는 난해한 단어들, 그 말이 그 말 같은 철학적인 내용들은 제 마음을 위축되게 만들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기독교사상사를 굳이 왜 해야하는지에 대한 불평, 불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란 사실을 곧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배우려하지 않는 제 안에 게으름을 보았습니다. 수업 한주 한주가 지날 때마다 각 주차에 해당하는 공부에 관련된 팁과 진정어린 교수님의 조언들은 무너진 마음을 계속 잡아나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전 찾기였지만 찾다보니 이것이 근육이 되어 다음 주차와 다른 과목에서 연계되어 학습의 재미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이 그 말 같았던 철학적 내용들은 다른 서적들을 통해서 그리고 지인들에게 질문함으로써 왜 그런 사고가 나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서양 철학사는 결코 기독교의 역사와는 떼놓을 수 없으며 신학을 위해서는 철학이 필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이제는 주객이 전도된 듯 어렵고 막막했던 공부가 이제는 너무 찾아보고 나서야 할 공부가 많은 것이 눈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제 엉덩이와 제 눈이 얼마나 버티어 줄 지 모르지만 필시 말수를 줄이고 시간을 아껴서 기독교사상사와 관련된 책들을 섭렵해 나가는 것이 뿌리 깊은 신학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강의해주실 때, 80% 정도는 교안에 맞추어 설명해주시지만 꿀송이처럼 달고 도전이 되고 근신이 되는 내용들은 말씀으로만 전해주셨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교안에 작성하지 않으셨는지는 모르지만... 가외로 들려주시는 통찰력과 권면의 말씀들은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는 듯한 말씀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저는 주차 별로 정리했고 이 내용들은 기독교 사상사를 공부하며 포기할 수 없었던 원동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조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주차 : ‘신앙이란 결코 주어진 여건, 현실이 아니라 오로지 약속에 근거하여 사는 삶이다. 그리고 아직 성취되지 않았으나 성취될 것이다.’ 그리고 3p에서 슐라이마허에 대한 부분에서 아주 강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 교육받은 성직자가 되자.”라고 말입니다. 흐트러진 제 중심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비트켄슈타인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참으로 부끄럽고 숨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의 한계 때문에 이 귀한 기독교사상사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신학적 언어가 깊어질수록 신학의 세계가 풍부해진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2주차 : 특히 2주차에는 교안에 없는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강의영상에는 가에서 라까지 항목이 나오는데 실제로 교안에는 가에서 다까지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공부하나 않하나 근신주시고 싶으셔서 일부러 그러셨는가보다 하고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결론에서 또 폭탄하나가 터집니다. “(앞부분 생략)... 중요하지 않다고 하여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지 않고 지나쳤다면 성서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잘못된 사고력으로 성서를 변질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 주여!! 중요하지 않다고 이해는 고사하고 지나가버린 순간이 왜 이렇게 잘 떠오르는지...

 

3주차 : 강의 시작부터 교수님께서 강한 펀치를 주셨던 날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를 누구라? 라고 생각하십니까?” 머리로는 아는데 아직 완전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황도 잠시 교수님께서는 6p에서 기독교사상사에 대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사상사를 통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의 변화, 변천 과정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역사 가운데 당신을 계시하셨고 당신이 계시한 이 계시들을 어떻게 인간이 올바른 방법으로 결정할 수 있는지 결정하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사상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더욱 더 확실하게 경험하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참말로 이 말씀은 돌로 하여금 쩌억하고 갈라지도록 하셨습니다.

 

4주차 : 5p에서 교수님께서는 성서와 그리스철학은 다르지만 협력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라고 말씀하셨고 7p에서는 고대 히브리, 헬라 철학을 선이해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는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이해하는 신앙을 추구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일공동기도문을 보려고 교수님의 블로그에 접속하면 항상 떠 있는 문구가 생각났습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내용이 정확한 적용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성서를 볼 때 그러한 이해가 되어야 함이라는 흐름에서는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5주차 : 실재론과 유명론이 언급되는 주차였는데 지금 보니 또 혼란스럽습니다. 첫째 표현이 친숙하지 않고 둘째 개념을 이해하는데 저용량의 머리가 도와주지 않는거 같습니다. 설명들었을 때는 명쾌했는데...

 

6주차 : 수업 시작부터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역사 비평에서 조직신학으로 넘어가려면 객관적인 철학적 인식이 필요하다. 철학의 기본적 이해 없이는 역사적 배경을 갖는 기독교 교리를 이해할 수 없다. 현재 기독교 진리의 요청에 대해서도 고유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조직신학은 교부시대 이래로 철학과 논의를 통해 발전되어왔다.” 이 말씀은 반은 도전이 되고 반은 철학... 우째야되노... 하는 한숨이 나왔습니다. 수업이 진행되고 9p에서 한숨은 사라졌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무엇인가? 영광은 그 자체 본래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삶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숨은 접고 철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시간이었습니다.

 

7주차 : 강의 시작부터 교수님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해주십니다. “중세는 암흑이 아니라 찬란한 교회의 신학과 교회의 문화가 세계를 지배했던 시대이다. 역사의 관점에 따라 해석은 달라진다.” 이 말씀은 참말로 충격적인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6p 부분에서 저도 슈바이처에 대해 비기독교적인 모습에 막연한 입장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처가 왜 복음적인 인물로 보기 어려운지 설명해주실 때 눈이 번쩍 뜨여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두 사건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8주차 : 중간고사

 

9주차 : 8p에서 성령훼방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해주셨습니다. ‘성령훼방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죄사함 받지 못한다.’ 막연한 개념정리는 완전한 오해를 낳을 뻔했습니다. 그리고 나인홀드니버의 말씀을 인용해주셨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이다.”

 

10주차 : 2p에서 역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를 잡아주셨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제대로 모르는 것이 문제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신이 버떡드는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훌륭한 평신도는 개인 신앙만 잘 해나가면 되지만 훌륭한 목회자는 복음을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다. 다음 세대에 넘겨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 말씀을 듣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게으르고 불평많고 연약한 제 모습이 하나님께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바르게 가르켜 주시는 우리학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정확하게 알자라고 다짐했습니다. 희미하게 가르키는 것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교수님의 지적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다시 한번 7p에서 교수님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적어봅니다.

 

희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실한 가르침을 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배워라!!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더욱 확실하고 분명한 준비된 사자가 되자!!”

 

11주차 : 1p에서 저 한순간이 아니라 오래 쌓여진 것이 이 시대에 돌출되었다.’ 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고 보면 우리 인생의 문제들도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쌓여진 것이 곪고 곪아 터지는 문제들이 많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12주차 : 계몽주의를 다루면서 5p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합리적, 이성적, 체계적 연구방법이 기독교의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도 학문적 과업에 대한 연구와 체계가 필요하다.’ 이 말씀을 들으며 지혜로운 분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13주차 : 교수님께서는 유독 판넨베르크라는 이름이 나오면 흥분하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분에 대한 책을 본적이 있는데 다시 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11p에서 주목할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성경에 충성할 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14주차 : 마지막 14주차에서는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강의 마지막에서 당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합리화하고 설득할 수 있는 기독교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다. 앞으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탐구해야 하는 부분이다.”

 

글을 맺겠습니다. 교수님은 우리들에게 도전을 주셨고 동시에 숙제를 내어주셨습니다. 정말 한국사회를 돌아보면 전방위적으로 다원주의의 거센 바람이 휘몰아 치는듯 합니다. 마트에 나가 물건을 사다가 흘러나오는 노래에 깜짝 놀랐습니다. 흘러나오는 캐롤의 가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복음적인 가사 그대로 가수들이 불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었던 케롤은 멜로디라인은 그대로인데 가사가 가히 악마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천사들의 노래가 하늘에서 들리니... 라는 부분이 알 수 없는 마법이 이 세상을 감싼다. 라는 식입니다. 천사가 언제 마법이 되어버렸는지요. 성역처럼 지켜졌던 찬송가 가사도 이제는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개사되어 버리는 시점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이제는 구원이 기독교에만 있다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면서 타종교를 존중해야 한다는 모순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동성애가 이슬람이 전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 현상은 역시 다원주의로 인한 영향들이라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사상사를 듣고 나서 정말로 깨달은 점은 깊음은 깊음을 부른다.’는 레이븐 힐의 말처럼 더 깊은 신학을 공부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해 나갈 때에 뿌리 깊은 신앙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신앙으로 이 세대의 흐름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