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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

수용할만큼 좋은 것은 아니다.

요즘 기독교 이단으로 불리우거나 이단 시비에 걸려있는 단체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러한 단체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관대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자신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단을 영적 자유를 주장하는 대담하고 용감한 소리로 간주하고 이단은 정통성 확보를 놓고 벌인 과거의 싸움에서 잔인한 기존 종교 권력에 패배한 용감한 패자들이며 역사는 승자의 손으로 기록되는 까닭에 이단은 불공평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도 처음에는 유대교에서 이단이었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전통적인 원시 문화에서는 그 문화에 합법성을 부여하고 문화의 토대가 되는하나의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이 토대를 이루는 신화에 도전하는 것이 곧 이단이 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너무나 많은 종교와 철학과 패러다임에 직면해 있어서 이제는 단 하나의 근본적이고 지배적인 거대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단을 뜻하는 영어 heresy의 어원인 헬라어 hairesis는 ‘선택하기’ 내지는 ‘선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표현하고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통제하는 자신의 역량을 펼친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이단으로 간주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공동체에 열심히 참여하는 헌신적인 인물들이었으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이해시키고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제시하는 일에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신앙을 보존하기 보다는 그것을 흔들거나 왜곡하고 파괴하는 교리를 주장했다. 그들의 잘못은 여러 가능성을 탐구하거나 관념적 경계선을 압박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에게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일부 목회자들의 가르침이나 그 방식들이 반드시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이나 방식들이 우리가 수용할 만큼 충분히 좋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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