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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하나님의 사람과 늙은 선지자(왕상 13:11~24)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나 자신이 지혜가 없어서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 성경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이해가 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고 내 삶의 원동력이 되는 능력의 말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오늘 묵상한 본문 열왕기상 13장 11~24절의 말씀도 이해가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첫째는 벧엘에 사는 한 늙은 선지자의 거짓된 행위도 그렇고, 둘째는 그런 거짓 선지자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지도 그렇고, 셋째는 거짓 선지자에게 속은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에 관한 일도 그렇습니다. 


먼저 벧엘에 사는 한 늙은 선지자의 경우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산당에서 제사하는 모든 제사장들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과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한 여로보암의 손이 말랐다가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로 다시 회복된 사건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먹고 마시도록해서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입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바로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선지자'라고 다 경건하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선지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선지자를 "늙은 선지자"(왕상 13:11)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늙은'이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이가 든' '노년의'라는 뜻도 있지만 '노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늙음에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부정적인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성경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욥기 12장 12절의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는 말씀은 늙은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디도서 2장 2절의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라는 말씀은 늙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면에 대해 가르쳐주는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늙은 사람은 지혜와 명철이 있는 반면에 절제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않으며 신중하지 못하고 믿음과 사랑과 인내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본문의 "한 늙은 선지자"도 디도서의 말씀처럼 경건하지 못하고 신중하지 못하며 믿음으로부터 멀어진 상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를 '영적 노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에서 떠나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과 아집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영적 노망'에 걸린 늙은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종종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 자신이 그런 '영적 노망'에 걸리지 않도록 깨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혹이라도 늙지도 않았으면서도 이런 '영적 노망'에 걸린 사람들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이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을 듣고 이 늙은 선지자의 집에 와 "하나님의 사람"이 먹고 마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노망'에 들린 이 "늙은 선지자"에게 임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불의의 길로 인도한 이러한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함과 죄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않아야 될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을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지만 거짓을 말하는 자칭 선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년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한국전쟁설'을 퍼뜨렸던 홍아무개전도사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은 그녀를 초청해서 간증집회를 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재산을 다 정리해서 외국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는 일입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사람"도 자칭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한 늙은 선지자가 말하는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고 그의 집에 가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 "늙은 선지자"에게 임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책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 이 늙은 선지자는 자기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 때로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분별할 줄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늙은 선지자"에게 속아 먹고 마신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에 관한 문제입니다. 늙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들은 "하나님의 사람"은 길을 가다가 사자를 만나 물려 죽었습니다. 사실 이 하나님의 사람의 잘못은 자기가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거짓말로 속여 하나님의 사람에게 떡과 물을 먹인 그 "늙은 선지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속은 "하나님의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속지 말라"고 일곱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이는 자도 악하지만 속는 자는 죄가 없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 5: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요 8:44)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 5:8). 그래서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단과 사이비에게 임할 심판도 크지만, 그들의 거짓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단과 사이비에 빠지는 것도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속이는 자와 속는 자 모두 심판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속지 않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영분별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올바른 신학에 기초한 신앙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인 나 자신이 올바른 신학적 토대가 없다면 이단과 사이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순수한 복음과 신앙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