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기독교 윤리라는 과목을 접하면서, 기독교 윤리는 일반 윤리, 즉 인간의 삶에서 선악의 기준이 되는 윤리와는 기본적으로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어떤 선의 기준을 놓고 논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인가, 아니면 인간의 방법인가, 하는 식으로 양분화해서 보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의를 들으면서, 기독교 윤리와 일반 윤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의 근거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나 도덕, 윤리적 기준도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 강의를 들으면서 인간이 영적인 동시에 도덕, 윤리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헬라 사상가 플라톤은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 즉 진리와 선을 알고 명확히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존재인 동시에 비이성적인 존재, 즉 영적인 존재로 설명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이상적인 삶은 이성에 따라 옳은 결정을 해 나가면서 실천적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비록, 두 사상이 상이한 면이 있지만, 인간을 선을 추구하는 존재, 즉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존재로 보는 것에는 일치하고 있다고 본다.
기독교 윤리가 추구하고 있는 목적을 이해하는 것은 이 학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했다. 이에 대해, 본 강의는, 기독교 윤리의 목적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서 그 신앙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행위와 관련하여 신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재고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윤리학의 임무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책임적으로 행동하고 살아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을 추구하고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으로 집약해서 생각해 볼 때. 그 전제 조건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과 어떻게 하면 그 요구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까, 하는 점을 고민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대한 하나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며 인간의 가져야 할 윤리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이며 신약의 중심이기도 한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본이 되는 완벽한 삶을 살아낸 완벽한 모델이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교혼과 삶을 본받는 것이 인간의 윤리적 삶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윤리의 목적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사신 삶을 우리도 따라 사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우리도 본받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윤리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윤리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한사람을 택하셨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택하신 것이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하나의 공동체로 한 몸을 이루시기 원하셨고 따라서 한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공동체 전체를 심판하시기도 하셨다. 아모스 선지자는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것을 호소했으며 예수그리스도도 가난한자들과 함께 하며 항상 그들 편이 되어주셨다. 이는 기독교인이 부당하게 억압받는 자와 가난한 이웃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강의, 사랑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배우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7-40)는 말씀을 다시 묵상하게 되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완전한 사랑이기에 기독교 윤리를 ‘사랑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신다. 인간에게 있어 마음은 가장 중심 되는 곳이다. 즉, 도덕적, 지적 생명의 자리이며 감정, 생각, 의지, 결단이 일어나는 곳이다. 예수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나 ”형제를 대하여 나가라 하는 자“에 대하여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죄이며, 곧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7)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윤리의 기준을 세울 때 그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동기를 강조하셨다. 진정한 윤리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를 체험한 사람으로서 서로 용서하고 화평을 이루는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이는 교회가 서로 용납하고 하나가 되는 공동체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타인의 문제나 사회 문제에 대해 비난하고 지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동체‘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에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즉, 교회가 판단의 기준, 삶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세상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 강의를 들으면서 유익했던 점은, 기독교 윤리와 관련된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을 접할 수 있었던 점이다. 고전 기독교 윤리학자 중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어느 수준의 윤리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반면, 루터는 인간의 덕은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 주시는 새로운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기독교 윤리학자 중 디트리히 본회퍼는 ‘거룩한 세속성’을 주장하는데, 이는 금욕적인 수양이나 고립된 기독교적 보호막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세상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함께 함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필요악으로 전쟁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칸트에 비해 본회퍼는 전쟁이나 폭력에 철저히 반대했던 평화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나치정권의 폭력에 반대해 히틀러 암살에 가담하고 처형된 이후 사람들은 평화윤리학자의 본회퍼와 히틀러 암살자의 본회퍼의 서로 상반되는 면모에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신앙과 행위의 일치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본회퍼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내린 결단은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가 주장해온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삶’ 이란 명제로 볼 때,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본 강의의 강점 중의 하나는, 낙태, 동성애, 사형, 인간복제, 생태계 파괴 등 여러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하며 정치, 사회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심과 참여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이 교회 울타리에만 머물고 기독교인들끼리만 만족해하는 이기적인 신앙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최근 일어난 동성애 퀴어 문화 축제 건은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를 위협하는 커다란 이슈였다. 한국교회들은 이 문제를 위해 기도하였고 일부 목사들이 서울시청 신청사 앞에서 동성애 퀴어 문화축제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많은 대형 교회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은 한국 교회의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많은 인간 사회문제는 일반윤리나 사회윤리 관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기독교 윤리를 기반으로 한 신앙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각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윤기봉 교수는 “내 생활습관, 삶의 태도가 본질을 결정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인의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강조한다. 또,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많이 보는지 관심 없다, 그들은 우리의 윤리, 도덕적 삶에 관심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교회가 지향해야 할 점이라고 선언한다. 윤기봉 교수가 강조하고 있는 기독교인의 삶의 태도, 윤리적 삶은 오늘날 물질문명과 성장 지상주의로 세속화되어 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인생의 가치가 빠르기보다는 올바른 방향인 것처럼, 기독교인은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올바른 수단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윤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다 보면 기독교인들도,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답습하게 된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낙태에 대해서는 쉽게 비난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기형아를 임신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이 아이를 낳아야 할지 고민이다’ ‘차라리 아이를 위해서 낙태를 선택하고 싶다’ 등의 한숨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한 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계신지 의심하게 되며 생명의 가치를 무엇보다도 중요시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해 버리는 것 같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은, 이런 말하는 습관, 작은 삶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 본다.
기독교 윤리는 초보 신학생에게는 조금 벅차게 느껴지는 과목이었다. 그 이유로, 많은 양을 습득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각 주제들을 충분히 분석하고 묵상하면서 내 것으로 소화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4주 강의를 마치고, 다시 공부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하나하나의 주제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강의를 통해 이해하지 못한 점이나, 더 알고 싶은 점을 교수님에게 직접 질문할 수 없다는 점이나 다른 학생들과의 디스커션을 통해 지식에 대한 이해를 확장해 나갈 수 없다는 점 등은 사이버 강의가 가진 약점이라 하겠다. 이런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다음 학기부터는 자유게시판을 더 많이 활용해야겠다고 다짐 해 본다.
<영남사이버대학교 신학과 3학년 정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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