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한벗출판사에서 발행한 에리히 프롬의 '휴머니즘의 재발견'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대학을 다닐 때 프롬의 저서들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많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오랜 시간 책장에서 먼지로 만든 모자를 덮어 쓰고 앉아 있는 책을 꺼내 모자를 벗겨냈다.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프롬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한가, 악한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해 에리히 프롬은 단순한 이분법 대신, 인간 내면의 복잡성과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며 답을 시도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본성과 도덕적 잠재력을 심리학적·철학적으로 깊이 탐구하면서,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인간다움에 대한 회복을 외친다. 이 책은 프롬이 평생에 걸쳐 주장해 온 ‘래디컬 휴머니즘(radical humanism)’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단순히 인간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 인간 내면의 자유, 책임, 사랑, 창조성, 그리고 파괴성에 대한 통합적 통찰을 제공한다. 오늘날처럼 인간이 기술과 이념 사이에서 갈등하고 소외되는 시대에, 프롬의 사상은 오히려 더욱 빛나는 것 같다.
인간의 심연을 응시하다
『휴머니즘의 재발견』에서 프롬은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의 가능성을 모두 지닌 존재로 진단한다. 인간은 본능적 충동에 이끌리는 동물이 아니라, 도덕적 자율성을 지닌 존재로서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관점은 프로이트적 결정론이나 마르크스적 유물론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자유와 창조적 가능성을 강조한다.
프롬은 “인간은 어떤 대상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인간의 정체성과 도덕성에 대한 결정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사랑의 방향이 생명을 향한다면(바이오필리아), 인간은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반대로 파괴와 죽음을 향한 사랑(네크로필리아)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자기중심적이며 비인간적인 존재로 타락시킨다.
또한 프롬은 권위주의적 성향과 기계적 순응주의를 비판하면서, 진정한 자아 실현은 외적 기준이나 집단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사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 사회의 획일화된 교육, 미디어, 정치 체계에 대한 강력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사유의 깊이와 철학적 전개
프롬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라는 두 지성의 후계자로서 시작했지만, 그들의 이론적 한계를 넘어섰다. 그는 프로이트의 인간 심리에 대한 분석은 인정하면서도, 인간을 오직 성적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로 환원시키는 점을 비판한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사회구조 비판은 긍정하면서도, 인간의 내면 세계를 소홀히 하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적한다.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프롬은 “인간은 자유를 감당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자유는 단순히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사랑을 동반한 적극적 자유(freedom to)여야 한다.
그는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이자 행동의 방식으로 정의한다. 프롬에게 사랑은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고, 성장하도록 돕는 ‘능동적 태도’다. 이는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소유하는 방식의 왜곡된 사랑과는 철저히 구별된다. 결국,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인간다움의 가장 정수에 해당하는 가치이며, 이 사랑이 실천될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
『휴머니즘의 재발견』이 출간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프롬이 던진 질문들은 오히려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데이터 기반의 효율성을 추구하며 인간성의 의미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 이전에 ‘호모 루덴스’, 곧 상상하고 창조하며 사랑하는 존재여야 하지만, 현실은 인간을 수치와 기능, 시장 가치로만 평가한다.
프롬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
- “사회는 성장했지만, 개인은 더 행복해졌는가?”
- “효율과 경쟁이 인간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그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인간 중심의 새로운 가치 체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그것이 라디컬 휴머니즘이다. 이는 인간의 정신적·도덕적 성숙을 전제로 하며, 정치·경제·교육 등 사회 모든 구조가 인간다움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급진적 제안이다.
신앙과 윤리, 철학을 아우르는 책
에리히 프롬은 심리학자이지만, 그의 사유는 철학자요, 윤리학자이며, 동시에 영적 사상가의 깊이를 지닌다. 그는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신학, 철학, 정신분석학, 사회학을 아우른다. 『휴머니즘의 재발견』은 종교적 신앙을 지닌 독자에게도, 무신론적 철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동일한 도전을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란 어떻게 회복되는가?
프롬은 마치 현대판 선지자처럼, 기술과 자본에 눈먼 세상 속에서 인간의 마음(heart)에 대해 말한다. 책 제목이 말하듯, 우리 안의 ‘마음’(심장)은 여전히 선과 악을 모두 품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마음을 어떻게 기르고 돌볼 것인지에 따라, 개인도 사회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학
『휴머니즘의 재발견』은 단순한 이론서나 학술서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향한 외침이며, 인간을 향한 격려이다. 프롬은 이 책에서 인간을 연민과 사랑의 존재로 회복시키는 길을 제시한다. 인간은 변화할 수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으며,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거대한 구조 앞에서 프롬의 책은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당신은 지금도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프롬의 휴머니즘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위한 살아 있는 인간학이다. 인간다움의 뿌리를 다시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깊은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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