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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 신학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 신학

목창균

 

서론

서구 세계와 문화는 역사적 전환기에 있다. 현대와 현대사상은 막을 내리고 있는 반면, 새로운 시대와 사상이 출현하고 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와 포스트모던니즘(postmodernism)으로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문학, 예술, 건축, 철학, 사회이론, 매스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 아닌, 여러 현상을 나타낸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통일된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거나 모순되고 혼란스런 현상을 포스트모던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실체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형성 과정에 있다.

신학에서도 포스트모던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학자들, 특히 미국 신학자들은 현대적 사고방식이 전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신학이 현대 정신과 세계관에 대한 응답으로 출현한 것이라면, 포스트모던 신학은 포스트모던 정신과 세계관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를 주도할 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해방신학을, 다른 이는 과정신학, 혹은 해체주의 신학을 지적한다. 아직 적절한 포스트모던 신학이 출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포스트모던니즘은 한국에도 이미 소개되어 문학, 예술분야에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고있고, 포스트모던 사상에 대한 연구서적이 적지 않게 출판되었다. 반면, 포스트모던신학은 소개되는 단계에 있다. 번햄이 편집한 [포스트모던 신학]이 번역되었고, 숭실대 한국 기독교 문화연구소에서 펴낸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등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복음적 기독교에 있어 큰 도전인 동시에, 복음증거를 위한 새로운 기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 본질과 특징은 무엇이며, 현대주의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신학적 반응은 어떠한가? 이 연구는 포스트모던 사상과 신학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제공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I. 현대의 종말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출현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사회의 새로운 지성적 관점이다. 그것은 현대 세계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현대성의 모순과 부작용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현대주의의 논리적 발전이요 계승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주의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과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출현 배경이 되는 현대성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서구 정신 문화의 역사는 흔히 세 단계로 구분된다. 전근대(premodern), 근대(modern), 후기근대(postmodern)가 그것이다. 전근대는 고대, 중세, 종교개혁시대를 포함하며, 우주론과 형이상학이 사상적 중심을 형성했다. 특히 그리스의 사변적 우주론과 기독교의 신학적 우주론이 결합되었다.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한 것이 전근대 세계관의 특징이다. 피터스(Ted Peters)에 따르면, 이 시대는“우주를 정신과 물질, 신과 자연, 자아와 전체의 단일 구조물로 간주하는 종교적 의식에 의해 지배되었다. 형이상학과 사회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의 계급적 존재의 계열(chain)에 연결되어 있다. 물질은 정신에, 노예는 왕에, 왕은 천사에,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 밀러(James Miller)에 따르면, 전근대 세계관의 주요 요소는 천상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을 분리시키는 형이상학적 이론, 우주 안에 있는 사물들과 질서를 기술하는 목적론적 언어, 전통을 지식의 근원으로 간주하는 인식론,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인간관 등이다. 한마디로, 전근대는 신적 계시가 진리의 최종 척도인 반면, 이성은 계시를 통해 주어진 진리를 이해하는 시대였다.

근대는 르네상스에서 준비되고 계몽시대에서 시작되었다. 계몽시대는 인간의 지위와 능력에 대한 평가를 향상시켰다. 인간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이성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는 현대 정신의 길을 열었다. 계몽사상의 특징, 곧 현대성의 기본 이념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다. 현대는 이성의 시대며, 현대성의 이념적 핵은 이성 중심주의, 즉 합리주의다. 현대를 지배하는 이성적 사고는 전근대적 환상, 선입견을 거부하고, 합리적 비판을 통해 지식의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려 했다. 그 상징적 인물이 현대 서양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Rene Descartes)였다. 그는 이성을 "잘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분간할 줄 아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절대적 신뢰를 두었다. 모든 사람이 이성을 고루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생각하는 자아의 존재를 진리 탐구의 제일 원리로 삼았다.

둘째, 기계적,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근대는 17세기 과학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 케플러(Kepler, 1571-1630), 갈릴레오(Galileo, 1564-1642), 뉴톤(Newton, 1643-1727) 등이 이룩해낸 과학적 발견들은 전통적 우주관은 물론, 사유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가정한 중세의 천동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그리고 자연을 거대한 유기체로 간주하는 중세의 자연관은 뉴톤의 기계적 자연관으로 대체되었다. 현대인은 자연을 물체들의 단순한 운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리고 질서있는 기계로 이해하게 되었다. 한편 데카르트는 우주를 물질과 정신의 영역으로, 그리고 칸트는 현상과 실재의 영역으로 나누었다. 이런 이원론이 현대 세계관의 또 다른 특징이 되었다.

셋째, 진보에 대한 신앙이다. 역사의 진행을 반복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순환론이 고대의 지배적 견해였다면, 그것을 발전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진보론이 현대적 사고의 특징이다. 계몽시대는 진보에 대한 신앙의 시대다. 현대 사상가들은 적당한 방법을 사용하면, 우주에 대한 진정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우주는 질서있고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대 정신은 지식은 확실하며 객관적이며 좋다고 가정했다. 또한 현대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삶의 질을 향상시켰으며 진보가 불가피하다는 낙관주의적 전망을 확산시켰다. 낙관주의는 평화적 분위기, 급속한 산업화, 민주적 정치구조, 역사의 진행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 과학에 대한 신뢰 등으로부터 유래했다.

한편, 현대성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분리주의였다. 현대 정신은 자아와 세계의 통일 의식을 파괴했다. 인간의 정신을 객관적 세계로부터 분리시켰다.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인간의 주체(주관)와 자연적 대상(객체)을 예리하게 구별했다. "현대 세계는 분리된 세계요, 깨어진 세계다." 전체를 부분들로 나누는 환원주의가 현대주의자의 방법론이다.

현대에 대한 비판은 19세기 니체로부터 시작되었다. 니체의 비판은 계몽시대의 진리 개념 거부에 그 토대를 두었다. 그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은 서양 이성 체계의 근거, 즉 형이상학의 정당성을 부정한 것이다. 또한 합리적 노력을 통해 발견되고 증명되는 보편적 진리 개념을 거부한 것이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의 출판은 현대성의 종말과 포스트모더니티의 잉태로 간주되었다.

앨렌에 따르면, 현대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네 기둥이 붕괴되고 있다. 자족성, 이성, 진보 그리고 낙관주의가 그것이다. 우리가 자기 완결적인 우주 안에 살고 있다는 신념은 일반적인 철학적, 과학적 신념으로 더 이상 수용될 수 없었다. 이성 위에다 전통적 도덕과 사회를 세우려는 모든 계몽주의적 시도들은 실패로 끝났다. 진보가 불가피하다는 개념은 범죄, 오염, 빈곤, 인종차별, 전쟁과 같은 심각한 사회, 경제적 문제들로 퇴색되었다. 지식이란 본래 선한 것이며, 학문은 선을 위한 도구라는 낙관적 신념은 유전공학의 남용, 핵무기의 위협 등으로 깨어지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은 근대로부터 근대 후기로의 대 전환의 시기였다.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는 이 역사적 전환을 나타내기 위해 193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스페인 작가 오니스(Federico de Onis)가 [스페인 및 라틴 아메리카 시선집](1934)에서 현대주의에 대한 반작용을 나타내기 위해 그 용어를 도입했다. 1939년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현대는 제1차 세계 대전과 함께 종료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확신하고 포스트 모던이란 용어로 그것을 표현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까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가 점차 건축과 예술 영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80년대 들어 문학, 철학, 사회과학 등 학술분야는 물론, 대중문화에까지 널리 확산되었으며, 20세기 후반의 시대 정신으로 간주되었다.

서구 지성사의 세 단계는 예리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을 만큼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전근대에 발전한 거의 모든 것이 근대에 남아있으며, 근대의 요소들이 근대 후기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관계, 즉 불연속성과 연속성의 문제가 논쟁이 되고 있다. 많은 학자들, 특히 미국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으로부터의 이탈과 단절 또는 그것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으로 이해한다. 이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은 탈모더니즘으로 번역된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계승과 발전으로 생각한다.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는 단순히 모더니즘 다음에 오는 후시성(後時性)을 가리킬뿐 단절이나 이탈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중도적인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관계를 단절 또는 계승의 양자 택일적 관점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포용하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존 캅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대성에 속한 것 중에 거부한 것은 개인주의, 유물론적 원자주의, 인간중심주의, 관념론 등인 반면, 계승한 것은 자기 비판주의, 개인에 대한 관심, 인간 자유에 대한 헌신, 탐구의 자유 등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주의의 논리적 발전이며, 계승인 동시에, 현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의식적 단절로 정의될 수 있다.

II.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과 특징

포스트모더니즘은 본래 미국에서 시작된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시대 사조였으나, 국가간의 경계선을 넘어 국제적 현상으로 대두되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건축분야였지만, 그것은 문학, 사진, 영화, 연극, 댄스, 비디오, 음악, 미술, 조각 등 모든 예술 형태는 물론,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에도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단일한 운동이나 경향이라기 보다 오히려 20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여러 현상들에 대한 포괄적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요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정신 사조의 핵심 이념, 원리 및 가치를 문제시하는 지성적 분위기와 문화적 표현"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 정서는 대개 부정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현대성의 토대가 되는 계몽주의 정신에 대한 거부를 나타낸다. 계몽주의가 현대의 시대 개념이라고 한다면, 현대에 대한 비판으로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반(反)계몽적일 수 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몇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의 이성 중심주의와 보편주의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반성이며 반작용이다. 그것은 현대적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정의된다. 포스트모던 정신은 진리를 합리적 영역에로 제한하거나 인간 지성을 진리의 전결자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은 현대 이성에 대한 비판을 급진화시킨 것이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그것은 현대의 세계관, 즉 객관적 세계관의 종말을 의미한다. 현대 세계관은 실재가 정해져있고, 인간의 이성은 그 질서를 자연의 법칙 속에서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의 진리 개념 체계 속에 존재(present)한다고 가정되는 것은 실제로 주어진(given) 것이다. 반면, 생물학의 진화이론과 물리학의 양자 이론의 발전은 현대 세계관과 전혀 다른 세계관의 출현을 촉진했다. 그것은 지각 대상이 되는 통일된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관점이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우리가 실재하는 세계(real world)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항상 변하는 사회적 창조라고 주장하며 비실재론을 선호한다. 우리의 세계는 일상 언어를 통해 건설되는 상징적 세계요 사회적 실재다. 현대 세계관이 기계적이요 결정적이라면, 현대 후기 세계관은 관계적이여 비결정적이다. 현대 사상가들은 객관적인 모든 것을 비인격적 기계장치로 이해했다. 세계를 기계 부속품과 같이 외적 관계로 연결된 독립적 부분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했다. 반면,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세계를 내적 관계를 갖고 있는 역동적 연계체로 이해한다. 세계를 하나의 완성된 피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며, 계속적으로 창조되는 것으로 본다. 인간은 이 계속적 창조과정의 산물인 동시에, 참여자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상대적이요, 참여적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20세기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이러한 세계관을 가장 잘 대변했다. 그는 세계를 실체라는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셋째, 포스트모던 정신은 통전주의적이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표어는 통전주의(wholism)이다. 현대의 세계관은 이원론적이다. 인간은 물질적 또는 객관적 세계로부터 분리된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정신이 분리한 것을 재결합하며, 인식하는 인간 주체와 인식되는 객관적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연속성을 재확인한다. 포스트모던 의식의 중심 요소는 전체에 대한 관심, 인격적이며 우주적 통합에 대한 관심이다.

넷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염세주의와 상대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성의 자율성, 과학의 능력, 역사의 진보를 신뢰하는 현대의 낙관주의를 염세주의로 대체한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선하며, 인간은 세계의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사고를 신뢰하지 않는 반면,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를 인정한다. 지식이 객관적이라는 계몽주의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히 상대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절대적 진리, 영원불변적 실재, 모든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는 초월적 관점이나 원리, 보편적 사실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담론은 개별적이며 제한되고 편협하다. 리요타르드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은“거대 담론에 대한 불신”이다.

다섯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심성의 상실, 표준의 해체다. 포스트모던 문화적 표현의 중심은 다원주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의 유일성이나 전체성을 철거하거나 교정하는 반면, 다원성을 강조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은 그 자체 내에 많은 의미와 흐름을 지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형태를 대별하면, 해체주의와 건설주의로 요약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는 긍정적 방향보다는 현대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부정적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해체주의는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인 실재론에 대한 공격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실재론에 따르면, 우리의 진리 체계 속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것은 실제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언어와 사유에 선행하여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언어와 사유를 통해 적절히 파악한다. 해체주의는 언어와 개념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실재에 결코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세계관의 필수 요소인 하나님, 자아, 목적, 의미의 제거를 통해 현대 세계관을 파괴하고, 신과 도덕성의 죽음 및 진리의 소멸을 가정한다. 자아는 순전히 관계적 감각 현상을 말하며,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무의미하며, 역사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선과 악이 없으며, 공유적(公有的) 가치도 없다. 보편성과 실재에 대한 현대의 주장은 사라지고, 절대적 상대주의가 출현한다. 그러나 해체주의에 따르면, 해체는 허무주의적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치료적 역할을 의미한다.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던니즘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사상가는 푸코(Michel Foucault), 데리다(Jacques Derrida), 로티(Richard Rorty) 등이다. 프랑스 출신의 푸코는 문화 역사학자요 니체주의자다. 그는 현대 세계관, 자아 개념, 인간론을 철저히 거부하고, 니체의 족보학(genealogy)을 도구로 서구 사상을 지배 해온 질서개념을 비판했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담론의 학적 영역을 탐구했으며, 지식은 항상 권력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알제리 태생의 데리다는 유대인 철학자요, 니체의 재해석자다. 그는 플라톤, 헤겔, 니체, 훗셀, 하이데거와 같은 서구 철학 전통의 주요 인물들의 저서에 대한 창조적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로고센트리즘(logo-centrism), 즉 언어의 토대에 존재의 임재 또는 본질이 있다는 가정을 공격하고, 언어가 고정된 실재에 연결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언어와 외적 세계 사이에 어떤 직선적 일치가 있다는 일반적 개념을 거부하고 양자를 연결하는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철학자 로티는 포스트모던 실용주의다. 그는 현대 자아 개념에 대한 공격에 동조하여 보편적 인간 자아를 부정했다.

반면, 건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정신에 대한 항거로 일어났으나 그것을 거부하는 대신, 개정하려는 것이다. 즉 해체주의는 현대 세계관의 가능성을 제거함으로써 현대 세계관을 극복하려고 하는데 비해, 건설주의는 현대의 전제들과 전통적 개념들의 개정을 통해 포스트모던 세계관을 구성함으로써 현대 세계관을 극복하려고 한다. 건설주의자들은 인간은 적어도 어떤 가치관과 진리를 공유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세계, 자유와 진리, 도덕성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도덕적, 미적, 종교적 관심들을 상관시키는 포스트모던 세계관을 형성하려고 한다. 생태학자, 평화주의자, 여권주의자의 관심을 지지하는 세계관을 제의한다.

건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을 철학적 토대로, 그의 창조성의 개념을 변화의 모델로 수용한다.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근대 세계]에서 근대 세계의 종료를 암시했으며, [과정과 실재]에서 과학, 종교, 철학의 새 방향을 제시하고 포스트모던적 사고의 길을 열었다. 화이트헤드 사상에 토대를 둔 건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과학의 통찰력과 지혜를 수용하는 한편, 현대인의 관점에서 과거의 전통을 재 평가하여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III. 포스트모던 신학

1. 포스트모던 신학의 태동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보편적 정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는 최근 신학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공통적인 것은 현대적 사고방식이 전환되고 있다는 평가와 의식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형성과정에 있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현대신학과 포스트모던 신학의 구별 문제도 논란이 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동일한 신학자가 포스트모던으로 분류되기도, 되지 않기도 한다. 테드 피터스(Ted Peters)는 콕스(Harvey Cox), 테일러(Mark C. Taylar), 스미스(Huston Smith), 그리핀(David Griffin)의 포스트모던 신학 방법을 검토하고, 이 중 누구도 아직 적절한 포스트모던 신학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반면, 머어피(Nancy Murphy)와 맥클레돈(McClendon)은 "현대신학과 포스트 모던 신학의 구별"에서 현대 사상의 세 가지 축으로 기초주의적 인식론, 표상-표현주의적 언어론 및 개인주의 또는 환원주의를 지적하고, 이것으로부터 벗어난 사상 형태를 포스트모던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 기준에 근거하여 린드벡(George Lindbeck), 티이만(Ronald Thiemann), 콕스, 알타이저(Thomas Altizer), 타일러의 최근 저서를 분석하여 한 종류 이상의 신학자들이 포스트 모던으로 분류되지만, 현대성과의 이탈 정도는 각 각 다르다고 주장했다.

포스트모던 신학은 현대 후기 세계관과 문화 및 의식의 전환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이해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정황의 조명 아래 기독교 메시지를 해석하려는 것이 포스트모던 신학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신학운동은 어디서 시작했는가? 토인비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이 결정적 전환점이다. 칼 바르트가 포스트모던 신학의 시발점으로 지목될 수 있다. 그는 1차 대전과 그 선행적 사건들에 대한 경험을 통해 현대적 실험의 많은 것을 거부했다. 그렇지만 그는 포스트모던 파라다임의 개척자는 아니었다. 단지 발기인이나 선창자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1964년 죤 캅이 신학에서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뉴 예일학파(New Yale School)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포스트모던 실험을 했다. 이 학파는 린드벡(George Lindbeck), 켈시(David Kelsy), 프레익(Hans Freirk) 등이 그 지도적 인물들이었으며, 새로운 인식론적 상황을 기독교 진리, 성경 및 교리 이해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간주했다.

2. 포스트모던 신학의 조류

포스트모던 신학은 여러 흐름과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죤 캅(John Cobb, Jr.)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해체주의와 과정사상으로, 그리고 칼 헨리(Carl Henry)는 해체적 접근과 건설적 접근으로 구별했다. 알렌(Diogenes Allen)은 그것을 네 종류, 즉 칼 바르트에 의해 대표되는 고백적 흐름, 실존주의적-해석학적 흐름, 신학적 해체 및 과정신학으로 분류했다. 그리핀(D. R. Griffin)은 포스트모던 신학을 네가지 기본 형태로 분류했다. 해체, 해방, 건설 및 보수적 포스트모던 신학이다. 이 가운데 해체주의, 건설주의, 해방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던 신학의 흐름을 살펴보자.

1) 해체주의적 신학

해체주의적 신학은 푸코와 데리다로 대변되는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근거한 신학이다. 그것은 전통적 가치 체계의 해체에 근거하여 전개된 부정적 성격의 신학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아, 진리, 목적, 의미, 실제적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체의 세계관을 파괴한다. 전통적 신 개념을 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의 죽음을 가정한다.

해체주의적 신학은 신학의 실제적 또는 문자적 제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통신학의 근본 토대의 해체를 통해 신학을 갱신하고 재생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해체주의는 신의 죽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테일러에 따르면, "해체가 신의 죽음의 해석학이며, 신의 죽음이 해체의 신학"이다. 해체주의 사조와 운동은 헤겔, 키에르케고르, 니체 등의 영향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특히 그 중심적 역할을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이다.

해체주의적 신학의 대표자로 간주되는 사람은 막크 테일러(Mark C. Taylor)다. 그는 하바드대학 출신으로 현재 마사추세트 주의 윌리암스 대학 종교학 교수이며, 미국 최초의 탈 교회적 조직신학자로 평해진다. 그의 대표적 저서로는 [방황 -포스모던 비/신학] (Erring - A Postmodern A/theology)과 [해체 신학](Deconstructing Theology) 등이 있다.

테일러는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하여 비/신학(a/theology) 또는 해체주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신학은 인본주의적 무신론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급진적 기독론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초월적 하나님이 이 세상의 물질에 완전히 육화되어 저 세상적이며 초월적인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 믿었다. 또한 신의 죽음과 더불어, 서구의 대표적 이념들, 즉 자아, 진리, 역사, 의미, 선과 악의 개념의 제거와 파괴를 주장했다. 그는 신학을 건설하기 보다 파괴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렀다.

테일러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간은 목표가 없는 삶, 즉 방랑의 삶을 사는 존재다. 그들은 옛 확실성의 상실과 새 신념의 발견 사이에서 방황하며, 신앙과 불신앙이 나뉘어지는 경계선 위에서 살아간다. 테일러 자신도 이 부류에 속한다. [방황]에서 그는 대립적 세계의 주변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해명했다. 그의 저서의 독특한 주제는 서구 전통 사상의 양 극, 즉 헤겔과 키에르케고르,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보편주의와 개별

주의 사이에 위치하는 여백이다. 그는 헤겔의 보편적 긍정(both/and)과 키에르케고르의 양자 택일적 선택(either/or ) 대신, 해체(neither/nor)를 제 3의 변증법으로 받아들였다.

테일러는 서구 전통 사상의 양 극 사이에서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고 그것을 포스트모던 시대에 종교적 반성을 위한 토대로 간주했다. 그는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사상은 신학적인 것도 비신학적인 것도, 유신론적인 것도 무신론적인 것도, 종교적인 것도 세속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항상 중간에 있었다. 그것은 근접성과 거리, 유사성과 차이, 내면성과 외면성을 동시에 의미하는 경계선을 주목했다. 비/신학적 반성은 방황하고 배회하고 정상적인 진로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있다. 비/신학은 유랑사상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한편, 테일러의 해체주의적 신학은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로 귀결된다고 비판받고 있다. 왜냐하면 테일러는 영원한 진리란 없고, 오직 영원한 흐름만 있다고 주장하며 진리의 상실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의 죽음은 동시에 자아와 목적의 상실을 의미한다. 신이 사라지면, 자아는 물론, 역사의 목적 자체가 사라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테일러의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은 초월적 하나님 뿐만 아니라 참 세계를 거부하는 극단적 허무주의적 신학을 구성한다.

반면, 해체주의 지지자들은 해체는 건설에 반대된다거나 해체주의적 입장은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로 이르게 된다는 비판을 잘못된 신념의 반영으로 취급했다. 오히려 그들은 해체는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해체주의는 서구 정신의 자기 파괴의 표현이며, 이 파괴가 도리어 구원의 역설적 도래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리핀에 따르면, "해체적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공하는 치료는 그 질병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2) 건설주의적 신학

건설주의적 신학은 건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에 근거한 긍정적,적극적 성격의 신학을 말한다. 건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주의의 잇점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현대의 계획들을 확장 또는 완성하려고 한다. 해체주의적 신학이 신, 진리, 자유, 가치, 도덕성의 소멸과 제거를 주장하는데 반해, 건설적 신학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에 대한 서구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건설주의적 신학의 대표적 신학자는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 교수 존 캅과 데이비드 그리핀이다. 그들은 과정신학 분야에서의 활동으로 이미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특히 그리핀은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에 포스트모던 세계를 위한 센터를 창립하여 포스트모던니즘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뉴욕 주립대 출판부(SUNY Press)에서 출판된 건설주의적 포스트모던 사상에 관한 일련의 문헌들은 그 센터의 작품이었다. 그들은 현대성의 분석,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토대, 즉 화이트헤드 철학 연구, 만유재신론(panentheism)의 적용 등을 다루고 있다.

그리핀은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을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 초현대주의(ultra-modernism) 또는 최고의 현대주의(mostmodernism)로 취급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대성의 일부 전제들의 논리적 결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해체주의 신학은 현대 무신론적 신학 가운데 하나다. 반면, 그는 자신의 입장을 건설적, 재건적, 또는 개정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대성의 전제들 가운데 많은 것에 도전하며 그들을 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화이트헤드(Whitehead)의 과정철학에 근거하여 현대성의 전제들을 개정하며 하나님과 자아와 같은 관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리핀에 따르면, 현대 사상의 전제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다. 감각 지각이 지각의 근본 형태라는 것과 세계의 근본 존재들은 자발성(spontaneity)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가 감각론(sensationism)이고, 후자가 기계적 자연관, 비물활론(nonanimism)이다. 이들 모두 초자연주의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현대 사상가들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감각 지각이며, 선 악에 대한 지식과 같이 감각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없는 지식을 공급하는 것은 초자연적 교훈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비물활론은 세계의 구성요소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며, 그것 역시 초자연적 유신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적 힘을 가지고 있다면, 세계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

초자연적 유신론은 현대 후기에 들어 점차 그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초자연적 유신론의 영향 아래 형성된 현대사상의 전제들을 거부했다. 반면, 건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성의 비물활론을 개정하여, 신물활론(neoanimism), 즉 자연적 유신론을 주장했다. 그것은 모든 현실적 개체들이 자발성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는 견해다. 그 개체들에서 구현되고 있는 궁극적 실재가 창조성이다. 자연적 유신론은 감각 배후에 있는 실재를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로 이해한다.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만유재신론(panentheism)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있고,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 초자연적 유신론은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자연적 유신론은 하나님은 물론, 유한한 존재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핀은 자연적 유신론에 근거하여 생태학적 포스트모던 신학을 주장했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철저히 생태학적이며, 생태학 운동에 의해 대중화된 지속적 통찰력에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그것이 우리 문화의 새 파라다임을 위한 토대가 된다면, 미래 세대들은 생태학적 의식과 함께 성장할 것이다." 그리핀은 이원론적이며 초자연적인 현대세계관을 거부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주체로서의 인간을 객체로서의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간주했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은 자연환경 파괴와 착취를 허용하고 생태계의 위기를 촉진시켰다.

그리핀은 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어떤 것도 전적으로 수동적이거나 또는 능동적이지 않고, 모든 것이 창조적이다. 이 자유와 창조성의 부정으로 생태학적 위기가 일어난다. 그리핀은 이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자연적 유신론에 호소했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더 이상 자연 공동체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핀은 우리 자신과 모든 창조물과의 조화를 이룩하는 공동체의 범 세계적 생태학적 비젼(vision)을 제시했다.

그리핀의 건설주의적 신학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자, 약점으로 지적된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성서적 신 이해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성서 계시에 대한 참조 없이, 그 자신의 신 이해를 제시했다.

3) 해방주의적 신학

하비 콕스(Harvey Cox)는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하바드대학 교수요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다. 1965년 출판된 [세속도시]는 영문판만도 수십만부가 팔린 베스트 셀러였으며 콕스를 일약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저서였다. 이 저서에서 콕스는 기독교의 철저한 세속화를 주장했다. 세속화는 종교를 무시하며 종교적 세계관을 상대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화 사회는 종교가 전혀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콕스는 최근의 저서 [세속도시의 종교: 포스트모던 신학을 향하여](Religion in the Secular City: Toward a Postmodern Theology)에서 이제 종교가 소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종교의 소멸보다는 종교의 재생(rebirth)이 가장 심각한 질문들을 제기하는 때에 기독교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신학의 과제로 보았다.

콕스는 포스트모던 신학은 사회의 주변에 있는 운동, 즉 문화적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포스트모던 신학을 주도할 두 후보로 매스메디아 근본주의와 해방신학과 결합된 기초-공동체 운동을 지목했다. 그리고 해방신학을 포스트모던 시대 선두에 설 최고의 기독교 신학 후보로 평가했다. 왜냐하면 해방신학만이 포스트모던신학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는 반현대적이며 포스트모더니티에 항거적인데 반해, 해방신학은 사회정의, 가난한 자의 권리, 구원에 대한 공동적 이해, 온건한 개혁으로부터 혁명적인 것으로 확장하는 정책을 주장한다. 공동체의 문제가 미래 지향적 기초 공동체와 과거 지향적 근본주의의 결정적 차이다. 근본주의 운동은 고립된 개인으로 이루어진 대중에게 호소한다. 반면, 라틴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기초 공동체 운동은 인격적 관계의 기계적 개념 보다는 유기적 관계에 기초한 작은 그룹과 조직체에의 참여를 강조한다. 테드 피터스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잠재력을 가진 해방신학의 가장 탁월한 면은 기초 공동체(base communities)에 대한 긍정이다." 그러므로 콕스는 해방신학을 수용하여 포스트모던 정신의 도전에 응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콕스의 견해에 대한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해방사상이 과연 포스트모던적이냐 하는 것이다. 피터스는 해방사상은 사유의 현대적 형태에 속하며, 해방신학은 현대적 삶을 변호한다고 보았다. 머피는 콕스가 변호하고 있는 해방신학이 현대적인지 또는 포스트모던적인지가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결론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이요, 새로운 세계관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의 운동이나 경향이 아닌, 여러 현상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명칭이다. 따라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요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계승과 단절, 양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합리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 관계적 세계관, 통전주의, 상대주의, 다원주의 등으로 요약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공헌은 현대 이성과 과학의 한계성을 지적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의 자율성, 과학의 효능, 역사의 진보를 맹목적으로 신뢰한 계몽주의를 비판하고 그 환상을 깨트렸다.

기독교 세계관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계몽주의 인식론에 대한 비판도 그 하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정신의 토대, 즉 지식은 확실하고 객관적이며 좋다는 가정과 확실성의 기준은 인간의 합리적 능력에 있다는 가정을 거부한다. 복음주의적 기독교 역시 합리적, 과학적 방법이 진리의 유일한 척도라는 것을 부정한다. 이 외

에도, 진보, 도덕적 완전, 기술적 발전에 대한 회의도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에게 큰 기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새로운 의식으로 기독교 진리를 재진술하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와 성서 계시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따라서 기독교 정신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인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대주의와 다른 근거에서 기독교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의 철저한 상대주의적 입장은 객관적 또는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성경의 절대성과 기독교 교리의 객관성을 손상시킨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의 무 중심주의는 실재의 통일된 중심이 있으며, 그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기독교 신앙과 충돌한다.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교리, 즉 거대 담론(metanarrative))의 거부는 거대 담론를 믿는 기독교 신앙과 모순된다. 기독교는 인류 구원과 창조 목적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활동의 이야기가 거대 담론이며, 그 초점은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라고 선언한다. 거대 담론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불신이 기독교 진리에도 적용될 때, 양자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넷째,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여러 다른 신앙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며,기독교의 배타적 교리의 희생과 성경적 계시와 영감의 거부로 귀결된다.

한편, 포스트모던 신학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도 분명한 정의가 제시된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던 정신과 세계관에 대한 신학적 응답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해체주의 포스트모던 신학과 건설주의 포스트모던 신학이다.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조류, 즉 해체주의와 건설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해체주의 신학은 하나님, 자아, 진리를 비롯, 전통적 가치 체계와 신학 토대 해체를 주장하는 부정적 신학이다. 그것은 포스트모던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대적인 것이며, 결국 상대주의 또는 허무주의로 귀결된다고 비판받는다.

건설주의 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에 기초하여 포스트모던 사고를 분석하고 새로운 세계관의 방향을 규정하려는 긍정적 신학이다. 그것은 21세기를 주도할 신학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그것 역시 태생적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 사상적 기반인 화이트헤드의 신관은 기독교 계시에 대한 참조가 전혀 없으며, 성서의 하나님을 자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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