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있다. 집을 나간 아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탕진한 후에 집으로 돌아온 동기는 아주 이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리라”(눅 15:17,18)고 생각했다. 그는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돌아갔다. 자신이 선택했던 길이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고, 이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길은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의 태도였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맞아 들였다. 아들이 자신의 죄를 깨달았는지,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는지,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했는지… 아버지는 그 어떤 고상한 동기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냥 아들이 돌아온 것이 기쁘고 감사하고 좋았다. 내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내 모든 존재와 소유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뜻일 것이다. 내 존재와 소유의 절반만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다시 묵상하며, 내가 탕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내 안에 아버지와 완전한 포옹을 꺼리는 저항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포옹을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자유와 독립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남아 있다.
하나님은 내 일부만이 아니라 전부를 원하신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내가 하나님께 돌아와 그 분의 품에 안기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참 먼 길이다. 기도할 때마다,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놓고 싸운다. 하나님이 내 존재의 전부가 되고, 내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사실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 속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 싸움을 오늘도 계속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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