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직신학

조직신학1 강의를 듣고

먼저 한 학기동안 어려운 조직신학 강의를 저희의 눈높이에 맞춰서 열정 넘치는 강의를 해주신 윤기봉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교수님, 강의 정말 잘 들었습니다. 배움을 통해 앎이 넓어지고, 그 지식을 통해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사실 이번 학기 조직신학 강의는 입학 전부터 듣고 싶었던 과목이라 입학 시에 수강계획표를 짤 때도 무척 정성을 기울였던 생각이 납니다. 좁은 소견에 조직신학은 신학에 대한 기초지식을 갖춘 후에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성서신학 과목들을 먼저 듣고, 마치 맛있는 음식을 아껴서 나중에 먹듯 조직신학 강의를 3학년에 듣기로 계획하고 기다렸는데 이번 학기를 맞이해 얼마나 설레었는지요. 제가 왜 이토록 조직신학 강의를 기다려 왔냐면, 무엇보다 제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은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이시라는 이 신비가 제 인식의 틀 안에 들어오기에 너무 벅찼습니다. 기도할 때 어느 위격의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지라는 어린 아이 같은 호기심에서부터 성령께서는 어떤 분이신지와 같은 질문에 이르기까지 저는 조직신학을 통해 저의 많은 호기심들이 실타래 풀리듯 풀리기를 소원했습니다.

 

첫째 시간의 신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에서 신학과 신앙에 대한 소중한 분별을 배웠습니다. 신앙에 대한 성찰이 신학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학자이어야 한다는 가르침 그리고 신학학위가 살아있는 신앙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가르침, 감사합니다. 다른 평신도보다 더 많은 콘텐츠를 공부하다 보니 자칫 교만으로 빠질 수 있던 마음을 겸손하게 다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자칫 잘못하면 제가 속한 교회공동체를 비판하고 공격하기 위한 방법으로만 흐를 수 있는 신학의 위험성을 미리 일깨워 주셔서 제가 좋아하는 조직신학 과목이 본래는 교회를 세우는데 봉사하는 학문이란 본질을 깨닫게 해 주셨음도 감사드립니다.

 

첫 번째 주제로 접한 신론을 마치고 저는 이 시대가 역사에서 어떤 지점에 와 있으며, 기독교에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과학과 의학과 같은 기술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했던 모더니즘 시대가 한계 앞에서 실패하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기술을 대체할 신들(gods)을 찾는 시대가 되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마치 구약시대의 하나님과 이방신들 사이에서 방황했던 인간들로부터 헬라적인 다신론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알지 못하던 신(17:23)들을 경배하던 인간들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악한 영적세력의 역사적 실체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조직신학의 역할은 더욱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일반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음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는 언젠가 그분을 대신하여 영광과 심판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세상에 역설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신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논쟁은 재림의 구주인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그치지 않겠지만, 신론을 통해서 저는 조직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는 유익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삼위일체론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가장 기대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인식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아니, ‘벽에 부딪힌 느낌이 제 심정에 대한 더 가까운 설명일 듯합니다. 마치 원점을 중심으로 어떤 방향으로 그은 직선의 길이만큼 무지의 반대영역이 생긴 기분이랄까요? 새로이 알게 된 지식은 제가 그간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가, 얼마나 진리에서 벗어난 가르침들을 진리로 알고 있었던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 한편으론 오히려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을 통해 뭣보다 놀란 것은 삼위일체의 교리가 성경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 개념이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 공동체의 신앙,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성령의 임재로 인해 아버지도 아들도 아닌 인격적이고 신적인 실체를 또 다시 체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이 세 가지의 신앙이 예수의 신성에 관한 아리우스 논쟁을 거쳐 성령의 신성에 대한 논쟁을 통해 삼위일체론이 형성되는 과정까지 왔을 때에 저는 드디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완벽히 이해하고 싶다!’는 제 갈망이 실현되는 줄 알고 가슴까지 두근거렸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카파도기아의 세 교부들이 만든 삼위일체 정식은 마치 이거랑 이거는 오답이니 안 돼라는 네거티브적인 답안 같아서 실망했습니다. 더불어 본질과 위격에 대해선 어떤 영어단어를 모른다고 했더니 영영사전을 펼쳐서 보여준 기분이랄까요? 솔직히 아직도 뜬구름 잡는 것처럼 그 개념을 모르겠습니다. 또한 성령의 이중산출 개념은 성령께서 예수의 영(4:6)이라고 믿고 있던 제 인식에 더 큰 혼란을 불러 왔습니다. 그럼 성경이 언급하는 성령과 내가 매일 기도드릴 때 만나주시는 성령이 다른 영일 수 있다는 뜻인가? 아마 요즘에도 공의회가 열린다면 전 단죄 받을 소지가 다분하겠지요?^^ 제가 강의 이전에 삼위일체에 대해 배운 마지막 가르침은 어떤 집회에서였는데, 강사 목사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부부를 통해 설명하시더군요. 서로 별개의 인격체이면서도 한 마음과 한 몸의 관계가 되는 부부의 관계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격체가 아닌 인격이시기에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하지만 그나마 가장 비슷한 추론이라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맞는 것인지 강의를 듣고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혹시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교회 공동체에 빗대어 이해해도 되는지요? 우리 모두가 지체이지만 각자가 독립된 인격들이고 우리는 교회라는 본질에 속한 공동체이니까 말입니다. 이 질문은 쪽지를 통해서라도 교수님께서 답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디 저의 무지한 어둠을 배움의 빛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다음의 인간론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죄가 본질적으로 무엇을 파괴한 것인지와 원죄에 대한 바른 이해였습니다. 특히 공동체를 붕괴한 의미로서의 죄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죄를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나 막연히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해 추상적으로 접근하던 저에게 죄로 인해 우리가 성취해내지 못한 하나님의 의도로서 공동체로의 부르심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습니다. 왜 저는 그동안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이 사회적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교의학으로서의 조직신학이 아니었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것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부르심에 소극적으로 응답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더불어 성경은 죄책이 직접적으로 원죄에 기인한다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고 가르친다는 내용(17:9-10,2:6)을 배웠을 때 합리적인 공의의 하나님을 발견하여 만났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 효과적인 설득의 도구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천사론에 관한 시간은 부담 없이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저는 수퍼내츄럴이라는 미국드라마를 즐겨 시청했는데, 그 드라마엔 천사와 악마가 마치 역사의 주인인 것처럼 등장합니다. 미가엘, 가브리엘과 같은 익숙한 이름 외에도 무슨 엘하는 낯선 이름들이 난무하는 B급 드라마입니다. 성경적이지 않아서 어느 시점에서부턴 흥미를 잃고 보지 않았는데, 드라마 속에서 천사나 귀신들이 인간들을 해치는 장면들이 중세적 이해에 머무른 것임을 강의를 통해 알았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라 부담 없이 강의를 들었지만 마지막 결론에서 사탄이 여전히 삼킬 자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새삼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마지막으로 기독론은 교수님의 전공분야이시기도 해서 그런지 강의시간 내내 더 많은 에너지를 느꼈습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기독론을 통해서 저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그 폭과 깊이를 더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강의를 마칠 때마다 제가 새삼 느낀 것은 사실 제가 구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단편적인 차원에 그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관계 안에서 서로가 인격적으로 사귐을 갖고 있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서로를 전인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함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저는 지금껏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깊이 교감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분에 대해 아는 바가 체험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그분의 인식과 사역에 대해, 인간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 의미에 대해 이토록 깊이 있는 앎의 세계로 초청된 적이 있었을까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앎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를 고려해 보니 하나님께 감사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가르침은 마치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을 때의 행복감에 비할 정도로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 천년 전에 나사렛 예수께서 창세기부터 존재하신 분이며, 이후에 오실 왕의 왕이요 주의 주이시라는 사실이 단순하도록 명쾌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신비를 함의하고 있는지요! 왜 그동안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통합되지 못하고 단편적이었는지가 여기서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조직신학을 배우기 전과 배운 후를 저는 수영에 비유해 보고 싶습니다. 이전까지 이론적으로만 알고, 다른 사람들이 헤엄치는 것만을 지켜보았다면 이제는 제가 직접 물속에 몸을 담갔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직까지 원하는 대로 영법을 구사하지도, 자신감을 얻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부분에선 앎에 대한 기쁨이 넘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혼란이 가중되어 인식이 저만큼 멀어진 듯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차원에 접근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배울 조직신학가 기대됩니다. 그리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조직신학을 좀 더 깊이 배우고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그때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관해 더 깊이 깨달아 하나님의 사회성을, 공동체로의 부르심을 인간사회의 온전한 모델로, 관계의 기본 원리로 적용하고 제시할 수 있는 방법도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끝으로 이제까지의 짧지만 풍성한 한 학기의 여행을 교수님 덕분에 길 잃지 않고, 재미있게 함께 하였습니다. 이런 기회와 교수님과의 사제관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쉽지 않은 콘텐츠를 저희의 눈높이로 낮춰 주시고, 제가 다 알지 못하는 제한과 여건이 있으실 텐데도 불구하고 열정과 지성을 다해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 번 마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조직신학에서도 더 많은, 더 깊은, 더 바른 가르침을 청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영남사이버대학교 실용영어학과 3학년 김형빈>

'조직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심의 본질  (0) 2019.06.02
현대신학의 종말론  (0) 2017.04.05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하여  (0) 2014.08.29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0) 2014.08.25
가장 공정하고 적절한 방식으로의 부활  (0) 2014.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