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몸에 지닌 메모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나 학자의 하나님은 아니다.” 파스칼이 이해하기에는 하나님은 철학자나 학자들이 탐구하는 애매한 분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자들의 사고 체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서 활동하시고 인간들을 만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기독교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는 독특한 교리로 믿고 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신앙이 좀 성숙했다 하는 사람도, 교회의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진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냥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존재양식이기 때문에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는 식이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평신도는 물론이거니와 신학을 좀 공부했다고 하는 목회자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파스칼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은 철학자나 학자의 하나님이 아닌 역사 속에서 일하시면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구체적인 하나님인데, 삼위일체(三位一體)말은 아무래도 철학자나 학자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알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또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당신의 존재를 계시하신 것이다. 만약에 아무리 인간에게 ‘나는 이런 존재다’라고 계시를 해도 인간이 알 수 없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럼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이 기독교 역사에서 확립된 것은 A.D. 325년의 니케아공의회(Concilium Nicaenum)와 A.D.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였다. 니케아공의회에는 두 편의 신경(信經)이 제출되었는데, 아리우스파(派)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가 제출한 것은 폐기되었으며, 팔레스티나 공동체의 세례 신경을 기초로 하여 ‘동질’(同質, homoousios)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의 신경이 채택되어 이를 기준으로 니케아신경이 공포되었으며,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되었다. 후에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 지속되어 오던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 사이의 논쟁을 니케아 신경에 의거하여 종결 짓고, 예수의 인간성의 실재를 부인하는 아폴리나리아니즘(Apollinarianism)을 단죄함으로써 예수는 참 인간이며 참 신임을 확인하였다.
사실 삼위일체에 대한 출발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이다. 초대 교회의 신자는 구약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고백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팔레스틴에서 활동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한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으며, 예수가 하늘로 승천한 뒤 열흘째 되던 날 이전에 알지 못하던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영적 체험의 주체인 거룩한 영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이전부터 믿어왔던 구약성서의 하나님도,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해서 승천한 예수도, 오순절 날에 자신들에게 임한 성령도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기반은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그들의 경험을 통해 고백해야 하는 신은 셋이 될 수밖에 없었고, 자칫하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었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 한 분 안에는 세 본질이 있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좀 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흔히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person, 인격)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세 인격(person)이라는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양태론이라는 말은 상이한 시대에 상이한 방식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한 분 하나님이 창조주와 율법수여자로 계시되었는데 하나님의 이런 측면을 ‘성부’라고 부르며, 같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주 형태로 계시되었는데, 이런 하나님의 측면을 ‘성자’라고 부르고, 같은 하나님이 성화하여 영생을 주시는 분의 행태로 계시되었는데 하나님의 이러한 측면을 ‘성령’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세 실체가 외양이나 연대기적 위치를 제외하면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동일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인간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인격(person)이라는 영어의 단어는 원래 라틴어 persona에서 왔는데 이것은 가면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이해할 때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구약에는 성부, 신약시대에는 성자 그리고 오늘날에는 성령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신다고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과 주장은 양태론으로 이단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mia ousia treis hypostases’(μια ουσια τρεις υποστασεις)이란 말인데 여기서 ‘ουσια’란 말도 ‘υποστασεις’란 말도 모두 본질이라는 뜻의 헬라어이다. 그래서 ‘한 본질 안의 세 본질’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따르면 ‘세 개의 상이한 “존재의 양태”로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한 분 하나님은 상이한 세 “존재의 양태” 성부, 성자, 성령의 양태로 동시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부 우월성이다. 물론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성자나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용인하지는 않았지만 성부의 존재가 바로 삼위일체의 근원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진술했다. 즉 그레고리우스의 표현대로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오며(begotten),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온다(proceed).”는 것이다. 그는 성부는 다른 근원에서 유래하지 않는 “자연적 존재”이며, 성자는 다른 이에게서 유래한 ”의존적 존재“이고, 성령은 보내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성령이 성부의 영인지 아니면 성자의 영인지 아니면 성부와 성자의 영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헬라 교부들은 신성의 유일한 근원으로서의 성부의 독특한 위치를 옹호하기 위해서 성령의 성부의 영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라틴 교부들은 리오공의회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고 선언함으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는 믿음을 굳게 세웠다. 물론 이러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 논쟁가운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