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자아(自我)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틴어로는 에고(ego)라고 하는데 ‘나’를 의미입니다. 이러한 자아(自我)는 ‘자기’ 또는 ‘나’로 체험되는 성격 중의 한 부분으로 무엇을 알고, 생각하거나, 계획하고 평가하는 우리의 심리작용을 지배합니다. 물론 자아는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반응하며 대처해나가는 역할도 합니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자아는 개인적인 관점을 제공함으로 행동에 계속성과 일관성을 주며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의 행동이나 미래의 행동을 연결시킵니다.
이러한 자아(自我)는 그 동안 기독교에서 그리 좋은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아를 가장 흉악한 적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자아가 부정적인 면을 갖게 된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완전히 타락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으며 더 이상 선한 모습이 인간 안에 없다는 생각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에 최대의 장애물은 바로 ‘자아(自我)’이며 그러한 “자아(自我)가 죽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사실 자아에 대한 심리학적 시각은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째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적 시각인데 대표적으로 제임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아를 두 가지 모습을 지닌 실체로 보았는데, 경험적으로 알려진 객체(object)로서의 자아와 주관적인(subject) 존재로서의 자아가 바로 그것입니다. 전자를 ‘me’라 불렀고 후자를 ‘I’라 불렀습니다. 제임스는 경험적으로 알려진 객체로서의 자아를 “물질적인 나(material me)”와 “사회적인 나(social me)” 그리고 “영적인 나(spiritual me)”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자아를 자아와 사회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 상호작용주의(interactionism)적 시각을 가진 사람으로 쿨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아개념을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한 상상과 이와 같은 상상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한다는 생각 속에서 나오는 자긍심이나 열등감과 같은 자기 느낌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쿨리의 개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미드는 객관적 자아인 “me”는 사회적 경험과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 있는 사회적 구조로 생성되는 것으로 보고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들을 배출한 사회적 구조의 반영이기 때문에 사람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 때에만 진정한 자아를 확립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셋째는 정신분석학적 입장으로 자아를 의식(conscious)과 전의식(preconcious) 그리고 잠재의식(unconcious)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우리는 프로이드를 꼽습니다. 그는 한 인간의 상식적인 측면인 이성적 기능을 ‘자아(ego)’라고 불렀는데 이 자아는 본능을 통제하려 애쓰며 자기비판을 하며, 다른 사람을 돌보다 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촉진시키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심리학적 시각과는 달리 성서는 자아에 대해 두 가지 양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 의욕과 다른 하나는 악을 행하고 싶은 의욕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본래적 양심의 소리가 우리 안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더라도 하나님처럼 되어야하지 않겠느냐는 비양심적인 소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바울 사도는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23).
이 고백을 했을 때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된 이후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속에 “한 다른 법” 즉 “악”이 함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순식간에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 사람 안에 죄적인 요소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이중적 자아로 묘사했는데, 그것이 바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라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육신의 생각은 자기중심적 자아이고 영의 생각은 타인중심적 자아를 의미합니다. 육신의 일은 자기중심적인 일이고 영의 일은 타인중심적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자아가 전혀 다른 자기 자신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 자아의 두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난 신자라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육신의 생각”, 즉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옛 습관과 태도 그리고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신자를 계속해서 성화(聖化)의 과정을 통해 “영의 생각”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며, 타인중심적인 생각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전한 자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던 최초의 사람이 가졌던 자아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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